동시대반시대

슈퍼마켓과 정의 : 누가 정의를 말하는가

- 만세

-센델의 정의론에 대하여-

기업형 슈퍼마켓이 골목으로 진출하고 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고 있다

1. 슈퍼마켓과 정의

SSM, 기업형 슈퍼마켓이 문제다. 대기업들이 골목길마다 큰 슈퍼마켓을 열고 있다. 재래시장을 비롯한 지역 상권은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자, 이 상황에서 ‘정의’는 무엇인가? 대기업들이 불법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냉정히 말해, 자기 돈 들여서 슈퍼마켓 짓고 장사하겠다는 데 그걸 못하게 하는 게 불법에 더 가깝다. 지금 대기업들의 논리가 정확히 이러하다. 자유 시장경제에서, 누구도 남들의 특정한 경제 행위에 이렇다 저렇다 훈수를 놓고 개입할 권리는 없다. 선택은 소비자들의 몫이다. 대기업과 재벌은 이렇게 외친다. “내 자본 굴려서 돈 벌겠다는데, 그만 앵앵거려라 니들 계속 그러면 우리도 가만 안 있는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국내 서점가를 정말 ‘쓸어버리고’ 있는 센델 선생이라면, 이것을 전형적인 자유주의의 함정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센델은 이 책에서 자신의 정의론을 정초하기 위해 두 가지 논의를 비판한다.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먼저 공리주의는 사회 전체의 행복량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라는 논의이다. 하지만 이는 만족이나 행복을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시작한다. 게다가 쉽게 다수자를 위해 소수자를 억압하는 논리가 될 수 있다. 원리상 공리주의에서는 로마 시대 대중의 만족을 위해 기독교도들을 사자 밥으로 삼은 일도 정당화될 수 있다. 일부 인종을 희생해 전체의 행복량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현대 사회에서 공리주의에 기반한 정의를 진지하게 밀어붙이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반면 자유주의는 현대의 주류적인 정의론이라 할만하다. 즉 각자의 입장과 활동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핵심이다. 그러지 않고 특정한 형태의 삶이나 사상을 강요하다면, 이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자유주의가 가장 경계하는 일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에서 ‘정의’는 특정한 입장의 윤리나 도덕을 떠나서 판단되어야 한다. 존 롤즈의 ‘무지의 장막’이 이를 잘 보여준다. 즉 자기가 어떤 인종, 어떤 계급, 어떤 사람이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국가 시스템을 짠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특정한 입장을 반영할 수는 없다. 그때 정의는 모든 이들의 입장을 존중하고, 보편적 복지를 설계하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센델이 보기에 모두의 입장을 존중하고 침해하지 않는다는 자유주의의 주장은 언뜻 좋아 보이지만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각자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것이 꼭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SSM을 둘러싼 논의가 좋은 예다. 자유주의의 원칙에 비추어보면, 기업의 활동을 비판할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지금이야 성소수자 인권이나 안락사와 같은 문제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취하는 입장 때문에 – 정부는 간섭하지 마라! – 자유주의가 좌파적 지향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자유주의가 보수적 논리로 작동하는 일이 심심치 않았다. 노예제를 둘러싼 더글라스와 링컨의 논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알다시피 링컨은 노예제를 없애려했다. 이에 반대한 더글라스의 주장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였다. 그는 중앙정부가 개인이 노예를 쓰건 말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센델은 개인들은 결코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함께 이 사회의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지 않다면, 독일인이 유대인들에게, 미국 백인들이 미국 흑인들에게 느끼는 미안함이나 죄책감을 설명할 수 없다. 정의는 바로 이런 연대와 더 큰 서사의 차원을 고려했을 때, 과연 ‘좋은 삶’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것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모두의 입장에서 벗어난 공평무사한 ‘옮은’ 것에서 정의를 찾으려 했다면, 센델은 모두가 연계된 존재임을 가정하고 이 ‘우리’에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에서 정의를 찾으려했다. 그렇기에 센델은 윤리나 도덕은 정치의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우리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뚜렷한 입장과 방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센델의 논의를 빌자면, 대기업들이 SSM을 무한 확장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여러 사회학자들은 대기업, 정확히 말해 재벌은 결코 혼자서 커온 이들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개발 독재 시절, 국가는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재벌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고 대출해줬다.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인 경우도 있었다. 대신 수출기업이 아닌 이들에 대한 대출은 철저히 제한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계’ 라는 일상적 대부업(–;;)이 성행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마이너스 금리의 차액을 매우기 위해 국가는 돈을 찍어냈다. 이는 고스란히 인플레로 이어졌고, 덕분에 국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자산을 까먹었다. 수출 기업들, 혹은 그 하청업체에서 저임금 과잉노동을 감내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음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그렇기에, 재벌이나 대기업의 더럽고 추악한 과거(노동탄압, 정경유착, 탈세, 비리 등등)를 모두 묻어두는 ‘혁명적 양보’를 할 때조차, 재벌과 대기업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분명한 책임이 있다. 대기업들의 역사와 이야기는 국민 모두가 잘나가는 세계적 기업을 만들기 위해 희생한 역사와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조금이라도 자각한다면, 대기업은 대한민국 국민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좋은’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세계로 진출하는 대신 골목길로 진출해서–;; 영세 상인들을 말려죽이시겠다? 그리고는 내 맘이니까 건들지 말라고? 이는 자신이 속한 역사적 서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사회의 ‘좋은 형태’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이, 이제 자기들이 좀 커지고 유리하니까 ‘자유’를 주장하는 가진 자의 횡포이다. 센델이라면 이렇게 외쳤을 지도 모르겠다.(결코! 내 말이 아님을 강조해두고 싶다. 나는 착하고 선량한 시민일 뿐이다.) “이런 XX, 근본 없는 잡것들아! 니들 그러다 큰 코 다친다! ‘정의’는 살아있거든!!”

2. ‘누가’ 정의를 말하는가?

자유주의와 공리주의를 넘어 이 시대의 정의의 불을 밝혀야 한다는, 우리 모두가 쫓아갈 수 있는 ‘좋은 삶’에 대한 뚜렷한 지향이 필요하다는 센델의 주장은 제법 시원하고 통쾌하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 건지 분노가 밀려오다 못해 슬퍼지는 요즘, 재미있는 예들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정의’의 대한 나름의 열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과연 이것으로 충분한가?

예전에 센델과 비슷한 수사와 논리를 동원하는 유명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미국의 엄중하고 세밀한 범죄 관리 정책의 모태가 된 ‘깨진 유리창’(Broken Windows)이라는 글이다.(http://www.theatlantic.com/magazine/archive/1982/03/broken-windows/4465/) 유명한 깨진 유리창 이론이 탄생한 글이기도 하다. 이 글 역시 센델처럼 각자의 입장과 자유를 존중하는 것을 넘어서자고 주장한다. 경찰이 개입해야 하는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아무 이유 없이 골목에 모여 분위기 잡고 있는 청소년들이나 거리를 횡행하는 노숙자는, 법적으로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면, 이들을 건드려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주민들의 불안감을 들이고 삶의 질을 악화시켰다.(예를 들어 우리도 중고등학생들 뭉쳐서 웅성거리고 있으면 몹시 무섭지 않은가?) 그래서 이 글은 경찰이 단순히 법을 수호하는 것을 넘어,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적으로 잘못한 것은 없지만, 청소년 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것을 제재해야 하고, 노숙자가 암묵적으로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법만 지키면 개인이 뭘 하건 건드리지 않는 것을 넘어, ‘추구할 만한’ 삶과 생활의 형태를 설정하고 이를 밀어붙이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경찰이 통제 범위를 확장하여 사소한 영역까지 관리하는 삶이 과연 우리가 바라는 삶인가? 오히려 범죄 때문에 불안한 삶만큼이나 찝찝하고 불쾌한 삶일 수는 있지 않을까?

'좋은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는, 사소한 것도 소홀히 하지 않고, 심각한 것은 정말 엄정하게 관리하는 강력한 경찰을 낳았다

센델이 이런 통제 사회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주장이 가진 논리적 유사성은 센델의 논의가 극단화될 때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 예언하는 것은 아닐까? 각자의 입장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 ‘좋은 삶’에 대한 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 동의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쉽게 이미 존재하는 다수적이고 주류적인 삶의 형태를 기준으로 ‘좋음’을 설정하고 이를 위계적으로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모델로 변하지 않을까? 이 사회의 구성원이 겪어온 역사의 서사를 이해하고 ‘좋은 삶’을 제시할 수 있는, 혹은 이를 제시하려고 할 이들이 대체 누구일지 상상해보라. 주류적인 가치관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그 사회의 엘리트나 존경 받는 이들이 이 역할을 하게 될 확률이 크지 않을까?

물론 이 엘리트들과 주류적 사고는 소위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배려는 다수적 기준으로 소수자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고 적당한 선에서 이들의 불만을 억제하는 통치의 연장일 것이다. 지금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한국’을 위해 대기업의 SSM을 제한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장애인의 삶을 ‘배려’하기 위해 복지예산을 늘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한국’은 장애인들의 사회 활동을 보장할 수 있는 활동 보조 서비스의 확장은 포함하지 않고, 불안한 상황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삶을 국가가 보장하는 기본 소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는 ‘아름다운 한국’의 그림에는, 장애인은 시설에 조용히 박혀서 식물처럼 살아가고, 돈 없는 노동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죽어라 노동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센델의 논의에서 생략된 것은 대체 ‘누가’ 정의를 말하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좋은 삶이 제안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제안된 정의 앞에서 대체 ‘누가’ 정의를 제안했는가 물어야 한다. 그 ‘좋음’이 어떤 기준에서, 무엇을 위해 등장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을 때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 중 하나는 세계에 ‘보편적인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든 선과 도덕은 특정한 주체의 관점을 담고 있다.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라면, 어떤 사회에 존재하는 모두의 입장을 반영하는 ‘좋음’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논의가 ‘보편적’인 가치라고 주장하는 논의의 이면에는, 자신의 당파성을 감춘 채 다른 이들을 현혹하여 지배하려는 권력의지가 흐르고 있다.

나아가 보다 능동적으로 각자가 ‘좋음’을 생산해야 한다. ‘누구’라는 물음을 던짐으로써 지금 존재하는 ‘좋음’을 고발하고 해체하는 것으로는 2% 부족하다. 누군가가 정의하고 내려주는 ‘좋은 삶’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친구들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좋은 삶’을 구상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물론 미진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다른 기준을 가진 이들로부터 비판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이 무조건 옳다고 고집을 피울 것이 아니라면, 그런 비판과 실패를 통해 처음 생각보다 나은 형태의 ‘좋음’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각자가 추구하는 ‘좋은 삶’이 무수히 제안되고, 그것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더 건강한 삶의 형태가 발굴되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실험이 반복되는 집단. 하나의 기준이나 선이 집단을 지배하는 대신, 이질적인 삶이 공존하고 서로 자극하며 늘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 집단. 아마 그것이 맑스가 ‘코뮨’이라 불렀던 공동체의 모습일 것이다.

It’s none of your business!!(신경 꺼!!) 미드를 보며 실없이 웃고 있다가 저 대사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답답해진다. 내 삶에 간섭하지 말라는 자존감 어린 선언에 동감이 되다가도, 그러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난감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거꾸로 My life is your business! please! 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좋은 삶’을 제안해야 한다는 센델의 논의가 우리를 울리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가 말해주는 ‘좋은 삶’에 나를 내맡겨버릴 정도로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면, 그 ‘좋은 삶’은 분명 독일 것이다. 당장은 내 삶의 목적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을 테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그린 그림 안에서 내 역할과 위치를 찾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내 삶을 돌보고 풍요롭게 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개발 독재 시절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그림 하에서 기꺼이 산업역군을 자처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보라. ‘그들’의 서사를 그대로 따를 때, 권력은 저항 없이 가장 쉽게 작동한다. 그렇기에 ‘좋은 삶’을 마주한다면, 그것이 대체 누구의 정의이며 좋음인지 반드시 물어야 한다. 나아가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정의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이들이 하나의 좋은 삶의 모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좋은 삶이 제안되어 서로 교류하고 실험되는 과정 자체일 것이다.

응답 4개

  1. 민지말하길

    음흠흠. 개인적으로 뭔가 바쁜 일이 있었는지 이번 글은 좀 성글구나. :) 여튼, ‘좋은 삶’이 뭔지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더이상은?) 없다는 것이 아쉽군. 우리가 하던 세미나 멤버도 늘어나고 책도 바뀌면서 되게 재밌어졌는데. ㅋㅋㅋ 만세 나름의 좋은 삶을 찾아 나가고 있는 거겠죵? 레알?

    (덧 : “예를 들어 우리도 중고등학생들 뭉쳐서 웅성거리고 있으면 몹시 무섭지 않은가?”는 좀 오버. ‘네가’ 그렇겠지. 쉽게 가려고 하는 마음이 살짝 과했어용 호호호 ^^)

    • 만세말하길

      너무 늦게 봤네요.^^ 글을 쓰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비슷합니다. 구상 포함하면 2, 3일 정도. 성글어보이는 건 주제에 대한 제 이해가 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 잘 지냅니다. 좋은 삶도 살아보려고 노력 중이고요. ㅎ 누님도 잘 지내시죠?^^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hwa and hwa, Progress_News. Progress_News said: [수유너머] 슈퍼마켓과 정의 : 누가 정의를 말하는가?-센델의 정의론에 대하여-: 1. 슈퍼마켓과 정의 SSM, 기업형 슈퍼마켓이 문제다. 대기업들이 골목길마다 큰 슈… http://bit.ly/aTTAp7 http://suyunomo.jinbo.net […]

  3. 지나가다말하길

    누가 정의를 말하는가? 누구에게 좋은 삶인가? 에 대한 질문, 역시 계급적 질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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