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난 기대하지 않는다. 마치 유행가 같다.

- 박김영희(여성장애학교교장)

며칠 전 주민센터를 찾았다. 지금의 활동보조 시간으로는 갈수록 나빠지는 몸에 갈수록 늘어나는 바깥 활동을 감당할 수 없어서 추가지원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사회복지과에서 추가신청요청서를 내밀었다. 그런데, 와상(누워있는 장애) 또는 사지마비장애인만 신청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결국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일급, 아니 특급(?) 장애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다. 활동보조 추가 신청을 하는 이유를 나열했다. 한 시간이라도 더 받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의사의 소견서를 첨부해 오란다. 그래서 단골로 다니는 개인 재활의학정형외과를 갔더니, 의사 선생님 말씀이 당신이 써준 소견서는 인정받지 못 하니 큰 병원으로 가보란다. 결국 장애 재심사를 받고 장애등급을 다시 판정받으라는 얘기다. 검사비는 본인 부담으로.

사실, 나도 내 장애 등급을 모르겠다. 누워 있기만 한 건 아니니 일급장애는 아니라고 하겠지? 판정은 결국 그들의 몫이다. 만약 내 장애가 일급이 아니라고 판정되면 그나마 활동보조 서비스조차 받을 수 없다. 검사받는 것을 망설여야 하고 불안해야 하는 이 상황에 화가 난다. 이 사회에선 장애가 죄다. 나는 ‘판결을 기다리는’ 수인(囚人) 취급받는 있음을 직감한다. 나의 삶을 180시간 200시간으로 재단하고, 그것도 한 시간이라도 더 받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스스로를 비굴하게 만드는, 그래서 나란 존재는 이 사회에서 불쌍한 동정의 대상으로만 규정되어 관리되어야 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가 치민다.

그들과 나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애인들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절벽 위의 사람들이 만든 조건과 기준에 맞는 자들만 위의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그들이 던져 주는 작은 먹이에 감지덕지하면서 그것이 우리를 길들이기 위한 미끼임을 알면서도 우리끼리 경쟁해야 한다. 그리고 절벽 위 사람들은 그들의 세상에서 안전하다.

우리 중에도 세상 위로 올라가 보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이 정해준 기준에 맞추기 위하여 항상 스펙 쌓기에 바쁘다. 쌓아도, 쌓아도 부족한 스펙에 갈증을 느끼는 것은 운명처럼 정해져 있다. 그들이 만든 기준에서 나는 제외된, 애초에 자격미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회의 정당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자격, 기준, 조건이 필요하다. 과연, 그런 조건들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로 주어지는가. 기회도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자격 여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초등학교 때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시합 우화를 배웠다. 어렸을 때 그 이야기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토끼처럼 자신의 재능에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커 가면서 의문이 들었다. 토끼가 깜박 잠들지 않았다면 거북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경기인데, 왜 거북이는 토끼와 불합리한 경주를 해야만 했을까? 꼭 해야 했다면 왜 출발선을 달리 하지 않았을까? 거북이의 조건과 토끼의 조건은 애시당초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거북이 스스로 자신의 핸디캡을 뚜벅뚜벅 억척스럽게 극복해내라는 것이다. 안 그러면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운 좋게 교만한 토끼를 만나면 이길 수도 있지만. 하지만 그것은 토끼들 세상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거북이들만의 승리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8.15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말하고 여기저기 ‘공정사회’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다. 공정한 사회는 누구든 평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사회라고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나에게 하루 24시간은 동일하게 주어진다고 하지만, 장애인의 시간은 다르다. 활동보조인이 있어야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람에게 지금은 한 달에 고작 몇 시간만 주어진다. 그것도 지극히 제한적인 의학적 관점으로 이뤄지는 장애판정에 의해 결정된다. 환경적인 조건, 지역적인 조건, 무엇보다 장애인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는 시스템도 구축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삶의 시간이 결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장애인은 따뜻한 ‘공정 사회’의 시혜 대상으로만 여겨지고, ‘공정한’ 자격 심사를 위해 스스로를 비굴하게 만들어야 하고, 준법적인 ‘공정 사회’를 위협하는 위험한 집단으로 취급당한다.

공정한 사회는 출발선이 다양한 사회다. 그 다른 출발선마다 필요한 만큼의 사회적 자원이 배분되어야 한다. 공정한 사회에 들어와야 할 사람과 들어와서는 안 되는 사람의 자격여부와 경계가 사라질 때 진짜 공정사회가 된다. 하기 좋은 말로 공정한 사회, 각자 따로 꿈꾸는 공정한 사회, 정권 재창출을 위한 공정한 사회, 누군가에게는 자신과 상관없는 말잔치뿐인 공정한 사회, 기득권을 위한 공정한 사회가 아니길 빈다. 그저 유행가처럼 휘몰아치고 사라질 구호가 아니길.

응답 5개

  1. dhdlRhc말하길

    박김영희님이
    장애여성공감에서 연
    ‘장애여성학교’ 교장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담당자님 확인 함 해보세요^^;;

  2. 임나혜숙말하길

    박김영희 선생님 잘 계시나요? 예쁜 얼굴 뵈니 반갑네요
    거북이와 경주를 하려면 바다에서 해야지…이런 불공정한 넘들…. 열 받아도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당

  3. 박카스말하길

    ‘동정’과 ‘공정’의 차이에 대해 선생님 글에서 잘 보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4. beforesunset말하길

    박김영희선생님~ 여기서 글로 뵈니 반가워요! 좋은글 써주셔서 감사해용~ 정말로 2010년 최고의 유행가는 ‘정의란 무엇인가’네요. 정의타령이 울려퍼질수록 공허할 뿐…

  5.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Progress_News. Progress_News said: [수유너머] 난 기대하지 않는다. 마치 유행가 같다.: 박김영희(노들장애인야학) 며칠 전 주민센터를 찾았다. 지금의 활동보조 시간으로는 갈수록 나빠지는 몸에 갈수록 늘어… http://bit.ly/cuBcLI http://suyunomo.jinb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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