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G20 그리고 힘없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고해성사

- 호흡(비정규직 예술가)

21세기의 샤를 필리봉을 위하여

얼마 전 누리꾼들을 떠들썩하게 한 일명 ‘쥐20그래피티사건’이 벌어졌다. 모 대학 강사가 G20홍보물에 그래피티를 한 것에 대해 영장을 청구한 사건이었다. 이 코메디같은 시츄에이션을 보며 더 이상은 웃을 수조차 없었다.

아니 오히려 괜스레 죄스럽다. 나 또한 길거리의 낙서(개인적으로는 정성을 드린 드로잉이라고 믿고 싶지만) 따위나 난잡한 그림, 어설픈 설치물을 작업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형식을 갖춰 엄밀히 말하자면 공공영역에서 다양한 사회적 메시지를 시각적 결과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이번 사건은 남일 같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여 고해성사를 하고자 한다.

첫 번째, 나는 성찰한다.
나와 나의 주변, 그리고 우리, 나아가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이 문제인 것 같다. 개인의 안위보다는 잘못된 것을 널리 알려 함께 대안을 고민해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던 것 같다.

둘째, 나는 통회한다.
시민으로서 예술가로서 힘이 없는 것이 죄스럽다.
나에게 힘이 있다면, 권력이 있다면 굳이 공공영역으로 박차고 나와 힘들게 고생하며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다.
나에게 힘이 있다면 입만 뻥끗해도 보기 싫은 노숙자들을 거리에서 없앨 수가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외국인은 우리나라에 발도 못 부치게 할 텐데 말이다.

셋째, 나는 결심한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물대포도 무서운데 최첨단 시스템의 장비들이 동원된 G20대비 집시 진압훈련을 보며 두려움에 떨며 쥐죽은 듯 집에만 있을 것을 결심해본다. 헌법에도 명시된 표현의 자유도 억누른 채 행여 외국인을 만나면 반갑게 ‘헬로우~’라고 외칠 것을 결심해본다.

넷째, 나는 고백한다.
그러나 위의 사항들을 이행할 자신이 없음을 고백한다. G20의 홍보물들에 아무리 세뇌를 당해보려해도 G20의 경제효과가 수십조 원이 넘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예술적인 수치라서 감히 믿을 수가 없다. (가히 ‘예술적 뻥튀기’라 할 수 있겠다.)

다섯째 나는 보속한다.
하여튼 이러한 여러 가지의 죄로 정부가 원하는 국민이 되지못해서 미안할 따름이다. 그 대가로 계속적인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좌절하지 않고 지난날에 저지른 죄와 악행들을 가시관처럼, 무거운 짐처럼 여기고 묵묵히 ‘표현의 자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이번에 ‘쥐20그래피티사건’의 당사자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란다. 힘없는 시민으로서 공공재산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간 그들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번 사건으로 훈방조치를 되는 성희롱범들보다 ‘힘없는 자’들이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것이 더 무거운 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현재 ‘쥐20그래피티’의 이미지는 또 다른 이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다. 그것이 낙서냐 예술이냐, 합법이냐 불법이냐의 이분법적인(다소 소모적인) 논제는 제쳐두고 사회적, 정치적 이미지 생산 활동, 또는 현장예술활동은 예술가가 현장에서 작업이 마치고 난 이후에는 이미 예술가의 역할을 끝나게 된다. 그 이후에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그것을 정치적이고 사회적 이슈로 만드는 몫은 대중들과 언론에게 달려있다.

나 역시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회적 시각 활동을 하면서 회의감이 들 때도 많다.
우리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을 더 이상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느낄 때 나는 미술작업을 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것 같아 가슴 아픈 ‘쌍용자동차 사태’가 그러했고 ‘용산철거민사태’가 그러했다. 그때마다 나름의 실천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 결과물들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이 함께 울었고 싸웠던 문제들이 잊혀지듯이 당시에 내가 진행했던 작업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리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모범시민으로서 안일하게 세상을 바라보기에는 이 사회가 너무나도 절박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있기 때문이다.

시청광장을 둘러싼 전경차를 보고 작업했던 그림, 미키마우스가 삽을 들고 전경차의 보호를 받고 있다.

쌍용차사태는 77일 동안의 파업, 2646명이 해고라는 어마어마한 비극을 낳았다. 산자와 죽은 자로 나뉜 이들을 생각해보았다.

실직된 노동자는 곧 우리시대의 고개 숙인 아버지이다.

마지막으로 19세기 무렵,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한 사건을 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당시 만화잡지의 발행인이자 화가였던 샤를 필리봉은 국왕이었던 루이 필립을 풍자하는 그림을 그린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출소가 된 후에도 그는 계속 풍자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LES POIRES’라는 제목을 그림을 선보였다. 그 뜻은 ‘배’ 혹은 ‘얼간이, 바보’라는 의미였고 이후 사람들에 입에서
루이 필립 = 배
라는 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국왕의 인격모독혐의로 또다시 잡혀간 샤를 필리봉은 자신 스스로를 변론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제1의 그림이 국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죄가 된다면
제1의 그림을 닮은 제 2의 그림도 죄가 되고
제2의 그림을 닮은 제 3의 그림도 죄가 되고
제3의 그림을 닮은 제 4의 ‘배’ 그림도 죄가 됩니다.
그렇다면 배를 재배한 농민들은 모두 유죄인가요?
배와 유사한 형태의 물건은 모두 국왕을 모욕한 것으로 고발되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정부는 배나무에서 열리는 모든 배를 투옥해야 마땅합니다.

점점 배의 모양으로 변해가는 루이 필립의 얼굴그림

헌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21세기를 달리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에도 제2의 샤를 필리봉이 있지 않을까? 자그마치 100년 전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일이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허면 우리의 민주성은 프랑스의 100년 전 민주성과 수준이 같다는 것일까?
‘쥐20그래피티’사건과 같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현상이 진정으로 국격을 높이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모범시민이기를 거부하고 현대의 샤를 필리봉을 응원할 것이다. 억압을 통해 높아지는 국격 따위는 필요 없다.

어처구니없는 블랙코미디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이여 자, 축배를 들자.

“대한민국 곳곳에서 시대의 저항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또 다른 샤를 필리봉을 위하여!”

응답 1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기픈옹달 and hoheup, 진보 뉴스. 진보 뉴스 said: [수유너머] G20 그리고 힘없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고해성사: 21세기의 샤를 필리봉을 위하여 얼마 전 누리꾼들을 떠들썩하게 한 일명 ‘쥐20그래피티사건’이 벌어졌… http://bit.ly/ddmb2d http://suyunomo.jinb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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