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윤리적이며 전략적인 유럽의 소비

- 맹찬형(연합뉴스 제네바 특파원)

우리 가족이 사는 제네바에선 오후 7시가 다가오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미그로(Migros)나 쿱(Coop)같은 대형 슈퍼마켓들이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폐점 시간을 1~2분 정도 넘겨서 도착해 “물건 한 개만 살 테니 좀 들여보내 달라”고 하면 간혹 입장시켜주기도 하지만, 계산대 직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감수해야 한다. 스위스 대형 슈퍼마켓들이 엄격하게 폐점 시간을 준수하는 데는 매장 직원들의 휴식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함이다. 소비자 역시 이에 동의한다. 노동자와 소비자는 고정된 관계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스위스의 대형 슈퍼체인들은 작은 동네 가게들과 개점 시간을 조율한다. 미그로와 쿱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문을 열고 일요일에 쉬는 대신 동네 가게들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문을 열고 월요일에 쉰다. 프랑스는 아예 가족노동이 아닌 경우 일요일에 일하는 게 법으로 금지돼있다.

우리나라의 할인점 홈플러스의 경우 24시간 영업이 기본이다. 신세계 이마트는 지역에 따라 24시간 영업을 하는 곳과 오전 10시부터 밤 12시까지 개점하는 곳으로 나뉘어 있다. 밤샘 영업은 당장 편리해보일지 모르지만, 할인점 직원들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노동 조건도 악화시킨다. 만약 서울의 직장인이 상사에게 “장을 봐야 하니 정시에 퇴근하겠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밤새도록 쇼핑을 할 수 있는 조건은 밤새 근무가 가능한 환경을 만든다. 잠들지 않는 노동과 소비의 피해자는 바로 우리다. 쉴새없이 돌아가는 소비구조 속에서 소비되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바로 인간, 우리 자신이다. 할인점 영업시간에 대한 통제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특히 서울의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밤 9시나 10시 쯤으로 제한하는 게 옳다.

할인점 직원들의 근무 방식과 이를 대하는 소비자들의 태도 역시 돌아봐야 한다. 스위스 최대 유통체인인 미그로와 2위인 쿱은 기업화돼있기는 하지만, 태생은 소비자 협동조합이다. 1925년에 설립된 미그로의 경우 스위스 전체 인구 720만 명 가운데 약 200만 명이 조합원이다. 사실상 소비자가 소유한 유통체인이다. 그런 만큼 매장 직원과 소비자의 관계가 일면적이지 않다. 미그로와 쿱의 매장 계산대 직원들은 앉아서 업무를 처리하고, 계산이 끝난 물건을 쇼핑백에 담는 일은 소비자 몫이다. 하루 종일 선 채로 고객을 맞고 물건 싸는 일까지 해주는 한국의 할인점 직원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정말 신선했다. 한국에서 할인점 계산대 직원들을 일어선 채 근무하게 하는 것이 혹시라도 고객에 대한 존중의 뜻에서 나온 관행이라면 정말 잘못된 일이다. 고객은 대접만 받는 ‘왕’이 아니라, 매장 직원의 처우에도 관심을 갖는 ‘이웃’이어야 한다.

매장에서 판매되는 제품과 국내산업과의 연관 효과도 짚어봐야 한다. 싼 물건을 파는 게 능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스위스 농가에서 생산한 계란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수입된 것보다 2배 가량 비싸게 팔린다. 스위스의 양계 사육 기준이 더 엄격해서 몸에 좋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지만, 스위스 농업을 살리기 위한 전략적 고려가 담겨있다.

대형 할인점들의 지리적 배치에는 소상인들에 대한 배려가 깔려있다. 미그로와 쿱 같은 대형 슈퍼마켓들은 상자 째 물건을 파는 할인점이 아니다. 미그로의 Mi는 중간(mid)을 뜻하고, Gros는 도매(wholesale)라는 말이다. 즉, 도매와 소매의 중간 형태 매장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 매장은 우리의 동(洞)에 해당하는 행정 단위인 코뮌에 한 개씩 있는 게 보통이다. 한국의 할인마트처럼 거대한 매장과 주차장, 음식코너 등 각종 편의시설을 두루 갖춘 매장들은 대부분 도시 외곽에 있다. 식료품과 생활용품을 판매하는 대형마트 알리그로(Aligro)는 제네바에 딱 한 곳 뿐인데 내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외곽 고속도로를 타고 30분 가까이 가야 한다. 또 다양한 대형 할인점들이 몰려있는 오봉(Aubonne)까지 가려면 40분이 걸린다. 값싼 제품을 대규모로 구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대신 시간과 기름값, 운전하는 수고를 들이도록 했다. 우리나라 서울처럼 대형 할인점들이 도심 곳곳을 차지하고서 소상인들의 목줄을 누르는 일은 없다.

우리가 윤리적 소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 전체 구조를 고려하는 합리적이고도 전략적인 소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소상인 보호를 위해서만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형 할인점의 24시간 논스톱 운영은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우리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좋은 일자리(decent work)의 창출 가능성을 좁힌다. 대형 할인점은 불안정한 비정규직 고용을 창출하는 대신, 일자리의 주된 원천 중 하나인 자영업을 몰락시킬 뿐만 아니라 재래시장 유통 및 연관 산업의 일자리를 줄인다. 개발 사업을 위해 소중한 식량과 환경 자원인 논을 갈아엎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신세계 이마트의 한 점포에서 피자를 구워 팔면서 5명의 직원을 채용하는 경우 가게 당 3명씩 채용할 수 있는 동네 피자가게 5곳이 문을 닫는다. 15명이 만드는 피자를 5명이 만들 수 있다면 더 효율적인가? 맞다. 하지만 그 효율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런 식의 효율에는 일하면서 살아갈 인간의 존엄한 권리 따윈 끼어들 틈이 없지 않는가? 국제노동기구(ILO)가 기회 있을 때마다 보고서를 통해 좋은 일자리의 확충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줄기차게 경고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자본의 효율을 국민 전체의 효율인 것처럼 호도하고, 일할 공간을 압착해나가는 방식으로는 온전한 성장을 바랄 수 없는 시대다. 이제는 면을 확장하고 시간과 공간을 넓게 펴서 그 속에 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합리적 소비’라는 말은 지금까지는 ‘싸게 산다’는 말과 등식을 이뤘다. 하지만 저가유통이 산업구조를 어떻게 왜곡시키고 경제 전체에 장기적으로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긴 말이 필요치 않다. 저가의 중국 제품으로 시장을 석권한 월마트가 미국의 자영업과 중급의 소비재 관련 산업을 어떻게 망쳐놓았는지를 보면 답이 나온다. 윤리적 소비라 하면, 뭔가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을 도덕적인 이유로 마지 못해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결국은 윤리적 소비야말로 일자리 확보와 노동조건의 개선, 연관 산업의 생존까지를 고려한 합리적이고도 전략적인 소비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한 소절을 빌자면 우리가 빨리만 걷다가 놓쳐버린 예쁜 고양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덧붙이자면 며칠 전 우리 국회에서 SSM(기업형슈퍼마켓) 규제법안 중 유통법이 통과된 것은 소중한 성과다. 하지만 거리 제한과 자본 구조에만 초점을 맞춘 SSM 법만으론 부족하다. 시간과 근무환경 등 좀 더 세심한 부분에까지 나가야 한다.

응답 4개

  1. 북극곰말하길

    스위스 상황을 보니 한국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있는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정말 유익한 글이에요. 감사합니다.^^

  2. iamlidy말하길

    좋은 글 감사합니다. SSM 문제에 대해… 아주 잠시나마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졌던 저로써는 부끄럽우면서도 또 뭔가 돌파구를 찾은 기분이군요. 블로그랑 클럽(같이 공부하는 친구들 있는)으로 퍼갈게요! 출처 남기겠습니다

  3. 퐁티말하길

    미국도 대형마트가 오지에 있다고 들었는데 스위스도 그렇군요. 정말로 시간과 근무환경도 다시 얘기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블로그에 퍼갈게요 ~

  4.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진보 뉴스. 진보 뉴스 said: [수유너머] 윤리적이며 전략적인 유럽의 소비: 우리 가족이 사는 제네바에선 오후 7시가 다가오면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미그로(Migros)나 쿱(Coop)같… http://bit.ly/d7Ml1L http://suyunomo.jinb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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