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난민, 국적 없는 삶의 절망과 희망

- 고병권(수유너머R)

“그들이 겪은 수난은 다른 집단들이 겪은 수난과는 다르다.” 한나 아렌트(H. Arendt)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난민’에 대해 한 말이다. 그들은 재산을 잃은 사람과도, 직업을 잃은 사람과도, 지위를 잃은 사람과도, 건강을 잃은 사람과도 다르다.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그들의 수난은 그렇게 특별한가. 아렌트는 그들이 ‘권리를 가질 권리’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앞서 나열한 사람들은 단지 어떤 권리를 잃었지만 난민은 ‘권리를 가질 권리’ 자체를 잃었다는 것이다.

난민은 재산, 직업, 지위를 갖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 자격을 결여하고 있다. 난민은 한마디로 그 나라 시민이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자기 정부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국적 없이 그 나라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난민에 관한 국제 협약이 존재하고, 소위 ‘인도주의’ 관점에서 정부의 일정한 보호가 이루어질 때에도, 이들의 삶은 거주국의 법이 아닌 도덕적 호의에 달려 있고(일정한 제도를 갖췄을 때조차 그것은 호의에 기초한 것이다), 호의를 베푸는 정부 역시 자기 정부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난민의 비극적 삶이 우리에게 호소하는 것은 연민이 아니라 사유라고 생각한다. 설사 아렌트의 말처럼 이들이 ‘도덕적 호소로서만 공허한 실존을 이어가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그렇게만 실존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이들 삶의 비극성을 철저히 사유해야 한다. 단지 국적을 잃었을 뿐인데 왜 이들은 ‘권리를 가질 권리’, 즉 ‘인권’을 잃어버렸는가. 이들이 주권 바깥에 있다는 것과 이들이 국민이 아니라는 것, 이들은 결코 대표될 수 없다는 것은 왜 동일한 사태를 의미하는가. 난민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는커녕 더 많은 난민을 양산하고 있는 근대 국가의 무능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난민의 삶은 그 수가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삶이 증언하는 것은 결코 예외에 대해서가 아니다. 난민의 삶을 규정짓는 요소들, 가령 주권, 국민, 법, 인권 등은 근대인들의 정치적 삶을 규정짓는 기본 요소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왜 국적을 잃은 것이 ‘권리를 가질 권리’, 다시 말해 인권의 상실을 의미하는가.

<프랑스 인권선언>은 근대의 정치적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이 선언의 원제목은 잘 알려진 것처럼,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이다. 하지만 선언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제목이 풍기는 뉴앙스와 달리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내용적으로 구분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누린다고 하는 권리의 내용이 우리가 통상 시민권이라고 부르는 ‘자유’, ‘재산’, ‘안전’, ‘저항’ 등이다. 게다가 3조를 보면 모든 권리를 가능케 하는 원천으로서 국민주권이 선포되고 있다(“모든 주권의 원리는 국민에게 있다.”). 결국 ‘선언’이 말하는 인간은 시민이고, 시민은 국민인 것이다(인간=시민=국민). 따라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시민의 권리를 모두 누리는 것이고, 이는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권리이자 ‘국민’이 누리는 권리인 것이다. 시민권 없는 사람들이라도 ‘인권’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시민권이 사라질 때 순수한 인권이 드러나기는커녕, 인권 자체도 사라짐을 볼 것이다.

난민의 ‘무국적’이 ‘무인권’으로 나타난 것은 그 때문이다. 모든 권리가 ‘국민=주권’을 통해 조직되었기에, 거기서 빠져나간 존재에게는 모든 권리가 박탈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난민’은 철저히 근대 국민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생겨난 개념이다. 물론 고대에도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나 어떤 이유에서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 했던 이방인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국적 상실과 함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난민은 모든 권리가 ‘국민=국가’를 따라서 조직된 근대 사회에서 생겨난다.

역사적으로 보면 국민국가가 완성된다고 말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특히 다양한 국민국가들이 세계 곳곳에서 생겨난 양차 세계 대전 중에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다. 실제로 ‘무국적자(stateless people)’라는 말 대신 ‘난민(refugee)’이라는 말이 공식적 지위를 갖게 된 것도 세계대전 이후였다.

그런데 ‘난민’이라는 말이 ‘무국적자’라는 말을 대신하게 된 맥락이 흥미롭다. 아렌트에 따르면 ‘무국적(statelessness)’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자국 정부의 보호를 상실했고 그들의 법적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제협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난민’이라는 말은 무국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 혹은 무국적자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어떻게든 추방해서 본국 송환 조치하거나 자국으로 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난민은 ‘송환’과 ‘귀화’ 사이에서 잠정적으로 체류를 허락받은 예외적 존재인 셈이다(물론 이는 공식적(?) 인정을 받은 난민의 경우이고, 난민의 법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어떤 의미에서는 난민 정의에 더 충실한- 소위 불법체류자들은 그런 허락 없이 삶을 살아간다.).

나는 여기서 국적 없이 산다는 것의 비극성을 고발하기보다 근대 정치체제가 이 ‘무국적성’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이유를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 무국적의 삶이 가진 비극성만큼이나 그것이 가진 체제 극복의 요소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민은 근대 국가를 지배하는 ‘국민=주권’의 도식, ‘인간=시민=국민’ 도식과 함께 성립한, 그 도식의 위반자다. 근대 국민국가의 성립과 함께 생겨난 그것의 진정한 타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 근대 국가의 타자들은 송환과 귀화, 심지어 히틀러가 자행한 ‘최종해결책’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생겨나며 오히려 더 늘어가고 있다. 불법체류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미국 한 나라만 해도 이미 천만 명을 넘었고(참고로 그 중 25만 이상이 한국에서 간 사람이다!), 한국에서도 수십만 명에 이른다(공식적으로 난민 지위를 획득한 사람은 수백 명 수준이지만).

근대 국가를 진정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존재들은 국가 권력의 탈취자들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무능함을 폭로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난민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귀화를 진정으로 바라는 수많은 난민들이 있고, 떠나온 나라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하위 인종집단을 이루는 이들이 많다. 상실했기에 획득과 보존에 대한 열망이 더 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든 이들의 존재는 이들의 성향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어떤 급진성을 갖고 있다. 국가 없이, 영토 바깥에서, 인간 아닌 존재(인권없는 존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런 삶이 실제로 존재하며, 게다가 더 늘어가고 있다는 것, 국가는 이에 대해 참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 사회 한 복판에서 그런 삶의 공간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법적으로 보면 국가 바깥의 영토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지구 어느 곳에도 국가에 속하지 않는 영토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영토가 법적 개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규정한다). 하지만 영토 바깥에도 어떤 지대가 존재한다. 법을 벗어난 곳, 소위 ‘치외법권지대(extra-territory)’는 말 그대로 ‘영토 바깥(extra-territory)’이기도 하다.

법이 없기에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힘을 가진 자의 호의가 아니면 생존이 금세 위험에 빠지는 곳, 하지만 법의 폭력성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국민=주권’, ‘인간=시민=국민’ 도식의 허구성이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곳. 여기서 이루어지는 고발을 경청하고 여기서 시도되는 삶을 주목하자. 법적으로 귀화와 송환(강제추방)만을 선택케 하고 문화적으로 적응과 배척만을 강요하는 압력 속에서도, 여기에 적응하지 않지만 여기를 떠나지도 않는 소중한 존재들에 주목하자. 이들이 우리 사회, 그리고 근대 정치를 돌파할 전위가 아니겠는가.

응답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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