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문학은 억압하는 대신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 김대경

공교롭게도 최근에 전쟁을 다룬 책을 두 권 연달아 읽게 되었다. 하나는 세노오 갓파의 자전적 성장소설인 『소년 H』이고, 다른 하나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이다. 두 권 다 자발적으로 선뜻 골라서 끝까지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우연히(결국 그 우연이라는 것도 내가 만들어낸 것이긴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두 책을 읽게 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이런 기회가 나에게 찾아온 것에 대해 무척 고맙고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변변치 못한 내 기억력으로 인해 책 속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을 상당 부분 잊어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왠지 이 책을 여러 사람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혼자서 읽고 잊어버리지 말고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전쟁’과 ‘인간’이라는 화두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년 H』는 1930-40년대 일본의 고베에서 소년기를 보낸 저자가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그 시대는 우리 민족이 한창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온갖 고통과 시련을 감내하며 살았던 암울한 시기가 아닌가. 우리는 숱하게 역사 시간이나 문학 시간에 그 시대 우리 민족의 삶을 고찰하고 성찰해 볼지언정, 비슷한 시기 일본인의 삶에 대해서는 돌아다볼 여력이 예전에도 현재에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내가 참여하는 권장도서목록모임에서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한 청소년 성장소설을 고르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분량이 만만치 않은 두 권짜리 책인데, 책 표지에는 가슴에 H라는 글자를 새긴 스웨터를 입고 멋쩍게 웃고 있는 소년이 그려져 있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시간적 ․ 공간적 배경이 우리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굳이 지금 우리 청소년들에게 추천할 필요까지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책장을 넘어가면서 나 자신도 모르게 책 속의 내용에 몰입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제주도에 여행을 떠날 때도 가방 속에 챙겨 넣고, 비행기 안에서, 지하철에서 수시로 꺼내어 읽었다.

전쟁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일본 본토의 상황과 당시 소학교 학생이었던 ‘H’가 느끼던 두려움과 공포, 분노, 안타까움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어느 날 신문에서 일기 예보가 사라지고, 학교 교정에 서 있던 동상이 철거된다. 미래에 대한 포부를 안고 입학한 중학교에서는 수시로 공습 대비 훈련을 하거나 방공호를 파게 만들고, 공장 일마저 시킨다. 그 와중에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가공할 전쟁이라는 사건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H’는 폐허가 되어 버린 세상에서 비틀거리면서도 꿋꿋하게 성장해간다. 책을 덮으면서 결국 이 책은 ‘일본’에 방점을 둔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전쟁’에 방점을 둔 성장과 극복의 과정을 다룬 이야기였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책에서 몇 개의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는 전쟁사가 아니라, 인간의 숨결과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진짜 전쟁을 공부했다는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온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 자신이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한 경험을 글로 기록한 작품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1984』라는 작품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제목의 책이 있는 줄은 몰랐었는데, 수유+너머의 금요인문강좌인 ‘여행문학 세미나’의 커리큘럼에 있던 책이어서 읽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스페인 내전의 내막을 조지 오웰이 너무나 생생하게 들려주는 바람에 역시, 이 책에서도 나는 본의 아니게 또 한번 예상치 못한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도 『소년 H』를 읽었을 때와 유사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독특한 전쟁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결국엔 그것을 통해 인간이 자신에게 닥친 불가항력적인 한계와 저항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그것을 겪어내고 견뎌낼 수 있는가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다른 성격의 전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겪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이 두 사람에게서 오히려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첫째, 이 두 주인공은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든 그 전쟁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내가 어느 나라 국민인가를 의식하기보다는, 이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으며, 왜 나는 적이라는 대상과 이런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아군이기 때문에 무조건 두둔하지 않고 적군이기 때문에 무조건 적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의심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대상은 다름 아닌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인 정치권력과 진실을 호도하는 언론이었다. 적의 소이탄 공격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집들이 불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알리지 않는 언론에 대해 ‘H’는 분노한다. 조지 오웰 역시 온갖 거짓말과 증오를 담은 전쟁 선전물이 실제로 전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총알과 진창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기사를 써 대는 신문 기자에 의해서 나온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둘째, 이 두 주인공은 모두 매우 적극적이고 호기심이 많으며 어떤 순간에는 지나칠 정도로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하다는 점이다. 소년 H는 적기의 무차별적인 공습에도 불구하고 전투기가 폭탄을 떨어뜨리는 장면을 보기 위해 용감하게도 방공호 밖으로 나오기도 하고, 조지 오웰은 적의 총탄에 목을 맞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자기를 맞힌 사람이 누구일까, 자신이 얼마나 더 버틸까 계산을 하는 등 자못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이들의 이런 성격(?) 탓에 전쟁 문학을 읽으면서도 연신 웃음을 튀어나온다. 어떻게 총알이 날아가고,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그런 여유와 유머가 나올 수 있는지 원.

셋째, 두 주인공 모두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태도로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년 H는 천황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발표가 끝난 직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너무나 벅차고 기쁜 마음에 전쟁이 끝나 정말 잘 되었다고 옆에 있던 학교 선배에게 이야기한다. 그 순간 그 선배는 느닷없이 무서운 얼굴을 하며 H의 따귀를 때린다. 길바닥에 나동그라진 H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선배는 아버지가 출정한 후 생사를 알지 못하고, 공습으로 집이 불탔으며 어머니는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누워 있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H는 그 선배와 함께 길 한복판에서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린다. 조지 오웰의 책에서도 자신이 정말 좋아하던 동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적군의 장교 앞에서 자신이 의용군 출신임을 당당히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사실을 말하는 순간 그 역시 죽을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장교는 오웰의 요청을 최선을 다해 들어주면서 마지막에 헤어지는 순간에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한다. 정치적 관계를 떠난, 같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공감과 애정을 확인하게 되면서 벅찬 감동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마지막으로 전쟁을 통해 두 주인공은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정신적으로(이성과 감성 모두)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이 끝난 직후에 H는 심각한 심리적 고통에 괴로워하며 심지어 자살의 충동까지 느끼기도 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과감히 집을 나와 학교 미술실에 칩거하면서 자신을 다독이고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살아갈 힘을 기른다. 조지 오웰 역시 전쟁이 끝난 직후 그것이 남긴 상처에서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참호의 냄새, 가없이 뻗어나가는 서광, 땅땅거리는 싸늘한 총소리, 폭탄의 굉음과 섬광. 지난 12월, 사람들이 아직 혁명을 믿고 있던 시절의 바르셀로나를 찾은 아침의 맑고 차가운 빛, 병영 연병장에서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 음식을 사기 위한 줄과 검붉은 깃발과 스페인 의용군 병사들의 얼굴. 무엇보다도 스페인 병사들의 얼굴. 전선에서 만났지만 이제는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르는 사람들.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불구가 되고, 일부는 투옥되었겠지. 바라건대 그들 모두가 여전히 안전하기를. 그들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들이 전쟁에서 이겨 독일인, 러시아인, 이탈리아인 할 것 없이 모든 외국인들을 스페인에서 몰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역할에 무력함을 느꼈던 이 전쟁은 나에게 대체로 나쁜 기억만을 남겼다. 그러나 전쟁이 없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런 참사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이런 단어가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두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고 고백해야겠다. 고통 그 자체라 할 만한 전쟁문학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주길 바란다. 남의 이야기이니, 그저 소일거리로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쟁을 추상화되고 피상적인 어떤 사건으로 본 것이 아니라 어떤 개인의 체험으로 고스란히 함께 겪는 기이한 경험을 통해 쉽게 몰입하고 감동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 재미있음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던 터에 우연히 문학평론가 김현이 쓴 글을 읽게 되었다. 다음 인용한 부분이 바로 내가 느낀 이 ‘재미’의 의미에 답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책은 저자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문학 작품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소년 H』는 청소년 성장소설의 범주로 분류되어 있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으로 출간되었다.)

남은 일생 내내 나에게 써먹지 못하는 문학은 해서 무엇 하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신 어머니, 이제 나는 당신께 내 나름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확실히 문학은 이제 권력에의 지름길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써먹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학은 그 써먹지 못한다는 것을 써먹고 있다.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는 서유럽의 한 위대한 지성이 탄식했듯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며, 물론 출세하지도, 큰 돈을 벌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유용한 것은 대체로 그것이 유용하다는 것 때문에 인간을 억압한다. 유용한 것이 결핍되었을 떄의 그 답답함을 생각하기 바란다. 억압된 욕망은 그것이 강력하게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더욱 강하게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문학은 유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억압하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은 문학을 통하여 억압하는 것과 억압당하는 것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부정적 힘을 인지한다. 그 부정적 힘의 인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개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당위성을 느끼게 한다. 한 편의 아름다운 시는 그것을 향유하는 자에게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에 대한 부끄러움을, 한 편의 침통한 시는 그것을 읽는 자에게 인간을 억압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감동이라는 말로 우리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 심리적 반응이다. 감동이나 혼의 울림은 한 인간이 대상을 자기의 온몸으로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행위이다. 인간은 문학을 통해, 그것에서 얻은 감동을 통해, 자기와 다른 형태의 인간의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확인하고 그것이 자기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한국문학의 위상』28쪽에서 인용

문학은 우리를 억압하지 않으며, 오히려 억압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는 그의 말이 결국은 진실임을 나는 이 두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역사 시간에 숱하게 요약해 놓은 전쟁 연표 대신에, 문학 시간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황석영의 <손님>,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를 읽으며 전쟁을 생각하고, 전쟁이 남긴 상처를 깊이 성찰해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즐거움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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