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보는 것, 사는 것

- 박카스(수유너머R)

무능력의 다른 이름, 연민

미국의 에세이작가이자 실천가인 수잔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위와 같은 전쟁으로 인한 참혹한 광경의 사진을 보았을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까?’

전쟁의 참혹한 광경을 다룬 사진들은 2차세계대전 발발이후 전쟁 사진작가들이 생겨나면서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쟁사진이 일간 신문들과 주간 신문들에 대거 실리기 시작했고, 2차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포토저널리즘의 등장과 함께 시대를 기록하려는 사진들이 대거 등장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충격적인 이미지들에 분개하며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이런 전쟁사진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TV에 나오는 전쟁의 참혹한 장면은 사람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며 채널을 돌리게 하는 화면으로 전락했거나 사람들이 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이미지가 되었다. 수잔손택은 이와 같은 현상에 주목하며 그 이유가 이미지를 보는 것에 머무르는 습관에 있다고 밝힌다.

“자신이 전쟁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 한, 사람들은 전쟁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날이면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폭력의 이미지들에 사람들이 그러한 폭력을 현실이 아닌 이미지로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전쟁의 이미지들을 통해 전쟁은 하룻밤의 진부한 구경거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한번 충격을 주다가마는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우리는 서서히 반응능력을 잃어가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TV속 참혹한 광경은 미개한 곳의 비극일 뿐이며, 잠시의 슬픔을 일으키는 이미지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러한 연민의 축적은 사람들을 무감각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의 이미지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폭력으로 인한 타인의 고통 일반에 무감각해지게 되었다. 수잔손택은 TV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구경꾼으로 전락한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진채 통속적인 사유와 행동을 반복하고 있음을 고발한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보스니아 밖에 있던 사람들이 저 끔찍한 이미지들을 보고서도 신경을 끄게 된 이유는 보스니아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도 않으며, 자국의 지도자들이 이 전쟁은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전쟁, 혹은 그 어떤 전쟁일지라도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사람들은 그 전쟁이 가져온 참사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연민은 변하기 쉬운 감정이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런 감정은 곧 시들해지는 법이다.”

묻고 답하기

하지만 세계에는 여전히 전쟁이 존재한다. 그리고 전쟁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냉소주의자가 한쪽에, 그리고 또 한쪽에는 넌더리가 날 만큼 전쟁을 겪으며 사진에 찍힌 괴로움을 고스란히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 나머지 한쪽에 존재한다.

무엇을 알게 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앎은 어느 현상이나 사실에 대한 원인을 밝히는 것에서 오는 것으로 현상이나 사실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주어진 것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묻고 그 원인을 아는 것, 좋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 앎은 물음에서 시작한다.

수많은 ‘이미지’들의 홍수 속에 보여지는 것들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어지는 것을 취하며 사는 무지의 삶을 멈추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여지는 것과 강요된 것을 취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이미지와 소리와 사물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과 대화하고, 싸우고, 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잔손택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 쏟아지는 잔혹한 전쟁 사진은 그 사진을 느끼기만 한 채 사진이 말하고자하는 것을 읽어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우리에게 폭력에 대한 무감각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또 누군가에게 그 사진은 폭력에 대한 관음증적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만 슬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이다. ‘저 잔혹함은 어디서 온 것인가? 우리는 누구를, 무엇을 비난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갖는 것이다. 전쟁사진을 혐오와 연민으로 간단히 치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우리가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마비상태로 머무르지 않기 위해 물음을 던지는 것. ‘저 고통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저 고통과 나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수잔손택은 서사가 우리가 뭔가를 이해하도록 만들어 준다면 충격적인 사진은 우리를 쫓아다니면서 괴롭힌다고 말했다. TV가 보여주는 이미지에 따라 웃고 울며 그러한 이미지의 폭력에 마비된 채 나도 모르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쫓아다니게 하는 이미지를 무감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물어야 한다. 묻고 답해야 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보는 것과 사는 것

지난 1년 동안 ‘날맹'(가명)이라는 친구와 한 집에 살았다. 이 친구는 현재 병역을 거부하고 경찰조사 대기 중에 있다. 내가 전쟁으로 인한 피해의 심각성을 알게 된 것은 이 친구와 몇 번의 술자리때문이었다. 라오스지역을 다녀온 후 아직도 그곳에서는 불발 상태로 남아있는 집속탄으로 하루에 한 명꼴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것에서, 그리고 집속탄에 의해 불모지의 사진을 전해보았을 때였다. 이 친구는 광우병 촛불집회, 용산참사 때의 전·의경을 보면서 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 질문이 생겼다고 했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동안 투하되는 미사일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 미사일을 쏠 수 있는지 이해해보고자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질문 끝에 상대를 나와 같은 감정과 욕구를 지닌 인간으로 보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총구를 겨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교육학을 공부하며 생긴 믿음은 인간이란 갈등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주고 존재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1년간 같이 지내며 알게 된 세심하고 착한 이 친구는 자신이 알게 된 현실의 문제를 묵인해야하는 군대에 간다면 이후 교단에 선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고 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총을 들어야하는걸까? 무엇 때문에 군대에 가야하는 걸까?’ 친구의 물음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이 친구가 병역 거부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밝히는 기자회견 자리에 동참했다.

기자회견은 국방청 앞에서 있었다. 국방청 앞을 지나가는 군인들은 기자회견을 하는 우리를 보고 웃고 지나갔고, 거리의 사람들은 잠시 쳐다봤다가 재빨리 다시 고개를 돌린 채 지나갔다. 친구의 소견발표가 시작되었고 한 국방부 관계자가 ‘때가 어느 땐데’ 라며 사진기를 들고 친구의 모습을 사진기로 찍었다. 화가 솟구쳤다. 무엇보다 이 추운 날에 피켓을 들고 나와 자신의 그간 고민에 답하는 친구의 진지한 모습이 국방청 관계자에게는 다만 사진으로 담아가 어느 리스트 따위에 저장해두어야 하는 기록물로 여겨지는 것에 화가 일었다.

집으로 돌아와 방에 누웠는데 가슴이 아팠다. 같이 사는 친구의 발표하는 모습이 멋졌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편으로는 마음이 심란했다. 아마도 내가 이 친구와 같이 산다는 것을, 같이 살고 있음을 머리보다 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회견장에 다녀와 사람들의 시선에서 나는 우리가 쏟아지는 이미지에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졌을 뿐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살아움직이는 존재들 마저도 다만 ‘보이는 것’ 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이미지의 범람으로 어느 덧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가장 첫째는 우리가 같이 살고 있음이 아닌지. 수잔손택이 지적한 범람하는 이미지로 인한 무감각을 벗어나기 위한 묻고 답하는 과정은 우리가 우리 옆의 존재를 다만 보이는 것이 아닌 같이 살고 있는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산다는 것은 죽지 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이미지나 권력에 마비된 채로 살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 살기 위해 문제를 공유하고 바꾸어 나가는 것에 더 가까운 말이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응답 2개

  1. 말하길

    뭐, 150여년전 강화도 앞에서 일본이 포 쏘면서 협박질했을 때도 평화롭게 강화하자는 사람들 퍽이나 많았더랬쬬.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login's, 진보 뉴스 and others. 진보 뉴스 said: [수유너머] 보는 것, 사는 것: 무능력의 다른 이름, 연민 미국의 에세이작가이자 실천가인 수잔 손택은 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위와 같은 전쟁으로 인한 … http://bit.ly/dP3kF9 http://suyunomo.jinb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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