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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의 서문 – 홀로 공부하는 이를 위해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순희淳熙 을미乙未년(1175년) 여름 동래의 여백공呂伯恭(여조겸)이 동양東陽에서 나의 한청정사에 와서는 열흘 정도 머물렀다. 함께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의 책을 읽고 그들의 가르침이 무한히 넓고 광대하다는 사실에 감탄하였다. 그러나 입문자들이 시작할 곳을 알지 못할까 걱정하여 우리는 학문의 핵심과 일상생활에 절실한 구절들을 모아 이 책을 만들었다.

총 622조목이며 14권으로 나누었다. 학문하는 사람이 구해야 할 실마리, 힘써 노력해야 할 점, 백성을 다스리는 법과 이단을 판별하는 법, 성현의 행실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이 모두 거칠게나마 실렸다.

그러므로 외진 시골에 학문에 뜻을 두고도 이끌어줄 훌륭한 스승과 좋은 친구가 없는 자가 만약 이 책을 얻어 깊이 마음으로 음미한다면 충분히 들어갈 입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 뒤에 네 군자(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전집을 구하여 깊이 새기고 반복하여 읽어 흠뻑 빠진다면 전체를 익히고 또 그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 곧 종묘宗廟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의 부유함을 누린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수고로움을 싫어하고 간편함에 안주하고 이 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금 이 책을 엮은 의도가 아니다.

5월 5일 주희가 삼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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淳熙乙未之夏 東萊呂伯恭來自東陽 過予寒泉精舍 留止旬日 相與讀周子程子張子之書 歎其廣大#博 若無津涯 而懼夫初學者不知所入也 因共撰取其關於大體而切於日用者 以爲此編

總六百二十二條 分十四卷 蓋凡學者所以求端用力處己治人與夫所以辨異端觀聖賢之大略 皆粗見其梗槩

以爲窮鄕晩進 有志於學 而無明師良友以先後之者 誠得此而玩心焉 亦足以得其門而入矣 如此然後求諸四君子之全書 沈潛反覆 優柔厭飫 以致其博 而反諸約焉 則其宗廟之美 百官之富 庶乎其有以盡得之

若憚煩勞 安簡便 以爲取足於此而可 則非今日所以纂集此書之意也

五月五日 朱熹謹識

1175년 여름, 멀리서 한 친구가 주희를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여조겸. 일찍이 공자는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즐겁다고 말했다. 물론 그 즐거움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더불어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터. 당대 사상계를 이끌어간 학자답게 이들은 만나 공부를 했다. 그것도 대단히 강렬하게! 주희와 여조겸은 선대 학자들의 글을 함께 읽으며 그들 학문의 깊이와 넓이에 감탄했다. 그러면서 이들의 글을 모아 책으로 엮어보자고 뜻을 모았다. 이렇게 태어난 책이 바로 «근사록»이다. 주희의 서문에 따르면 여조겸이 주희의 거처에 머문 것은 고작 열흘 남짓. 그 짧은 시간에 이 책이 구상되었으니 이들의 ‘세미나’가 얼마나 불꽃 튀기는 열정의 도가니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근사록

«근사록»에는 두 편의 서문이 실려 있다. 하나는 앞에서 간단히 소개한 주희의 서문, 또 다른 하나는 공동 편집자인 여조겸의 서문이다. 그런데 이 둘의 서문이 기록된 시기가 서로 다르다. 주희의 서문은 1175년 5월 5일(음력)에, 여조겸의 서문은 한 해 뒤인 1176년 4월 4일(음력)에 기록되었다. 아마도 1175년 이 둘이 만나서 전체적인 밑그림을 함께 그린 뒤 몇 달에 걸쳐 책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176년 여조겸의 서문에는 이 책을 읽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독자들의 반응에 답하는 내용이 있으니 이미 1176년에는 이 책이 유통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이 선대 학자들의 글을 모아놓은 일종의 선집이기 때문이다. 아마 직접 쓴 글이라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완성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도 꼼꼼한 성품의 주희로서는 더더욱. 그래서 «근사록»을 펼치면 이렇게 시작한다. 신안新安 주희朱熹,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 편집編集. 주희와 여조겸이 함께 모아 묶어 낸 책이라는 뜻이다.

그럼 누구의 글을 모아둔 것일까. 주희는 그의 서문에서 여조겸과 함께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의 글을 읽으면서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북송시대의 유명한 학자로 주희가 매우 존경하는 선배 학자들이었다. 어찌나 존경했는지 위대한 스승에게 붙이는 호칭인 ‘자子’를 이들의 성씨 뒤에 붙여 놓았다. 굳이 풀이하자면 «근사록»은 ‘주씨 선생, 정씨 선생, 장씨 선생’의 글을 모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명색이 저자인데 그저 성씨만 알 수는 없지 않은가. 간단히 이들의 이름이라도 알아놓도록 하자. 먼저 주씨 선생, 주자周子의 이름은 주돈이周敦頤(1017~1073)로 호는 렴계(濂溪)이다. 다음으로 정씨 선생, 정자程子는 좀 복잡하다. 무엇이 문제냐 하면 ‘정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 둘은 정호程顥(1032~1085)와 정이程頤(1033~1107) 형제를 가리킨다. 연년생인 이 두 형제는 모두 뛰어난 학자로 후대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워낙 함께 연구한 부분이 많아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부득이 ‘정자’라고 묶어 부르게 되었다. 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정자二程子라고 하기도 한다. 정호의 호는 명도明道, 정이의 호는 이천伊川이다. 마지막으로 장씨 선생, 장자張子의 이름은 장재張載(1020~1077), 호는 횡거橫渠이다. 이들 네 명을 묶어 북송사자北宋四子라고 부른다. 북송시대 훌륭한 네 분의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정호와 정이

아마 이 글을 읽으면서 낯선 인물이 여럿 갑자기 튀어나와 혼란스럽다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이름만 들어도 낯선데 거기다 굳이 호까지 적어놓는 이유는 무엇이냐고 타박할지 모르겠다. 일부러 어렵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을지. 그러나 옛사람의 경우엔 이름보다는 호를 더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보니 오늘날 글에서도 이름보다는 호가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나중에 다른 글에서 이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당황하지 말라는 뜻에서 일일이 붙여놓았다. 그러니 이름과 호는 간단히 알아두자. 다시 네 명의 학자를 정리하자면 주돈이(주렴계),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 장재(장횡거)이다. 이들의 명문을 모아놓은 책이 바로 «근사록»이다.

이 책이 선집인 이상 중요한 것은 편집자의 의도이다. 글이야 훌륭한 학자들의 글을, 그것도 엑기스만 모아두었으니 얼마나 좋은 내용이 가득할까.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듯 주옥같은 글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으면 그저 멋진 글들의 모음 이상은 안 되기 때문이다. 맥락 없이 읽다가는 그저 단편적인 정보들만 수집하는데 그치게 된다. 과연 주희는 무슨 생각에서 이 책을 엮은 것일까.

주희는 서문에서 학문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이를 위해 이 책을 편찬했다고 말한다. 주희는 뛰어난 사상가로 알려져있지만 그는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학문에는 정확한 단계와 순서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무턱대고 아무렇게나 시작했다가는 도리어 길을 잃고 시간과 노력만 낭비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세밀한 단계별 교육지침을 마련한 데는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불교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주희 시대에는 많은 학자가 불교에 심취했다. 특히 화두를 붙잡고 수행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주희는 단박에 깨치는 돈오頓悟 대신 수준별 텍스트에 따른 공부법을 강조했다.

이를 따르면 «근사록»은 처음 학문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주희는 이런 순서를 사다리로 비유하기도 했다. 주희의 구상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읽은 뒤 육경(六經, 시경, 서경, 주역, 춘추, 예기, 주례)을 읽어야 한다. 사다리의 비유를 끌어다 설명하면 사서가 육경으로 가는 사다리가 된다. 그런데 그는 «근사록»은 사서의 사다리가 된다고 보았다. 쉽게 말해 사서를 배우기에 앞서 먼저 «근사록»을 읽으라는 말이다.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오르듯, «근사록»을 읽으면 사서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 되고 사서를 읽으면 육경을 배울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주희는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한다. 외진 시골에 이끌어줄 스승이나 친구도 없는, 그러나 학문에 뜻을 둔 젊은이가 «근사록»을 충실히 읽는다면 학문의 길에 들어가는 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학문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이끌어줄 스승과 친구(師友)이다. 그러나 요즘에도 마찬가지지만 외진 변두리에 있으면서 훌륭한 스승과 동료를 만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좋은 책 한 권!! 주희는 «근사록»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장담한다. 실제로 많은 후대 유학자들이 입문서로 «근사록»을 읽고 연구했다. 조선 성리학자들도 마찬가지.

그러나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오늘날 사람에게는 «근사록»이 무척 어렵다. 일단 나오는 단어나 개념이 생소하다. 거기다 사서를 비롯한 다른 경전의 글을 마구 인용해서는 어디까지가 인용이고 어디부터가 저자의 생각인지 도무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근사록»이 사서의 사다리가 되기는커녕 사서를 «근사록»의 사다리로 삼아야 할 지경이다. 어깨 너머로 전반적인 내용을 습득할 수 있었던 과거 전통사회와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오늘날을 비교해 볼 때 텍스트의 질감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사록»은 학문의 목표와 방법을 개괄한 책이다. 책이 만들어진 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은 유효할까? 몇 차례 «근사록»을 읽어본 결과 충분히 의미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물론 구체적인 현실 문제야 따로 상술해야겠지만 공부하는 사람이 겪어야 할 고민과 고충은 여전히 똑같은 것이 아닐지. 게다가 과거 성리학자들이 그린 우주와 세계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전해준다. 때로는 사유의 촉매제로서, 때로는 공부의 길잡이로서 «근사록»은 여전히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근사록»에는 모두 622개의 글 조각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을 모두 다룬다면 십수 년이 걸리리라. 앞으로 전부는 아니지만 앞으로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하나씩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과연 언제까지 연재할 수 있을지. «근사록»의 편집자들이 의도한 것처럼 연재가 계속되어 «근사록»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는 수 있나. 될 때까지 마음을 버리지 말고 가는 수밖에는. 낯선 «근사록»을 향해 첫걸음을 내딘 독자들도 끝까지 함께 가기를!

응답 1개

  1.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and 이병진, 진보 뉴스. 진보 뉴스 said: [수유너머] 주희의 서문 – 홀로 공부하는 이를 위해: 순희淳熙 을미乙未년(1175년) 여름 동래의 여백공呂伯恭(여조겸)이 동양東陽에서 나의 한청정사에 와서는 열흘 … http://bit.ly/eJxCEn http://suyunomo.jinbo.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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