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종말론의 시대, 종말의 사유

-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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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아니 재작년에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의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활동가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프리타 전반노조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던 젊은 활동가와 무슨 얘긴가를 하다가 <고지라>라는 일본 괴수영화에 대한 책 얘기를 들었다. 고지라에 대한 책이라고 하지만, 심형래 영화에 대한 진중권의 비판 같은 걸 모아 낸 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와세다 대학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연구하고 있던 그 활동가의 지도교수가 진지하게 쓴 책이라고 한다. 고지라에 대한 책까지 읽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러면서도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연구하는 진지한 양반이 진지하게 쓴 책이라니까 궁금해서 어떤 내용인지 물어보았다. 서툰 일어라서 정확히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와중에 귀에 들어와 꽂힌 구절이 있었다. 그건 ‘고지라’ 같은 괴물이 출현했다면, 그런 괴물을 만들어낸 사회에 대해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고지라는 현실 속에 출현한 것이 아니라 영화 속에 등장한 것이었지만, 비록 허구 속에 등장했다고 해도, 상상 속에서 그런 괴물을 만들어낸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그 전 해인가 한국에서 보았던 <괴물>이란 영화 생각이 났다. 그 영화에 등장한 괴물 역시 실재가 아니라 허구적 구성물이지만, 그런 괴물이 최근 영화에 등장한 것이 사회적인 어떤 이유를 갖는다는 말에 공감하기는 어렵지 않다. 강물에 수많은 화학약품들이 흘러나가는 현실, 그리하여 그 속에 사는 물고기들에 어떤 신체적 변화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차라리 이상하다고 해야 할 현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를 본 것은 그런 이유의 설득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괴물처럼 어떤 특정한 존재자나 소재가 소설이나 영화에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처한 현실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징후라고 보아야 한다. 가령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면 초능력이나 특별한 능력을 갖는 사람들의 얘기를 지나칠 정도도 반복하여 보게 된다. 그건 초능력이란 초과학적 현상에 대한 일본인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재를 징후가 아니라 직접적인 현실로 다루는 착각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쩌면 충실하다 할 정도로 규칙과 규제에 잘 따르는, 그러나 그런 만큼 그 규제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답답함을, 평범한 능력으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기에 초능력을 통해서라도 그런 것을 깨고 넘어서고 싶은 욕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저 턱없다고 비난하기은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속의 초능력자란 넘어설 수 없는 현실 속의 규제와 규칙, 답답함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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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의 하나는 전쟁이든 뭐든으로 인해 파괴되고 황폐화된 세계, 혹은 종종 ‘정화’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 세계의 종말적인 사태다. 물론 대개는 거기서 살아남으려 싸우거나 그러한 ‘정화’나 종말적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이는 일본만의 징후는 아닌 것 같다. <터미네이터>나 <12 몽키즈>, <아마겟돈>, <투머로우> 등의 수많은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란 점에서 훨씬 더 큰 외연 속에서 나타나는 징후들로 보인다. 기계들에 의해, 핵전쟁에 의해, 자연파괴에 의해, 유성의 충돌에 의해, 생물학적 무기들에 의해 야기되는 종말의 픽션들. 이는 어떤 것들의 징후라고 해야 할까?

최근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상가나 이론을 보면, 신학적 형태를 취하거나 그런 요소들에 크게 기대는 것이 많다는 사실이 일종의 징후적 현상처럼 눈에 들어온다. <남겨진 시간>은 물론 <호모 사케르>나 <세속화 예찬> 등 많은 책들에서의 아감벤이 그렇고, <사도 바울>에서의 바디우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의 지젝이 그렇다. 또 맑스주의 문학이론가인 이글턴도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서를 모아 낸 데 이어 최근 <신을 옹호하다>라는 제목으로 무신론을 비판한 책을 냈다. 신학이 이론적 논의의 ‘지반’까지는 아니어도 중심적인 테마 중 하나로 부상한 이러한 현상은 또 어떤 것들의 징후일까?

종말의 허구들 속에서, 혹은 신학의 화려한 재기 속에서 종말의 징후를 읽어낸다면 너무 안이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반복하여 등장했던 종말론이 종말의 징후였다면, 인간은 수도 없이 종말을 맞았어야 할 것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종말론이 등장할 때는 페스트 같은 질병에 의해서든, 전쟁이나 궁핍에 의해서든, 혹은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종말’로 표상되는 어떤 위기가 다가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 내지 공포를 갖고 있던 시대였다는 어떤 역사가의 얘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또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이 속한 세계의 운명에 대해 어떤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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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그런 종말론적 현상들이 마치 어떤 강박증적 증상처럼 반복하여 출현한다면 어떨까? 구제역이란 전염병을 막겠다면서 감염된 동물 인근에 있던 멀쩡한 소와 돼지 등을 ‘학살처분’하기 시작한 지 두 달만에 이미 320만 마리를 죽였다. 그것도 대부분 생매장하는 방법으로. 아마 구제역이 아무 대책 없이 확산되었어도 이렇게 많은 동물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방을 위해 더 많은 동물을 죽이는 이 끔찍한 학살이 구제역을 막는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이고 “그렇게 해야만 청정국가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국가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구제역은 부산까지 퍼져 전국이 학살의 현장이 되었고, 급기야 ‘철통방역’을 내걸고 씨동물들을 보호한다고 하던 충남 천안의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 산하 축산자원개발부에까지 퍼져 축산당국 자신이 관리하던 동물들마저 학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농장은 430만㎡에 젖소 350마리, 돼지 1645마리 등을 사육 중인데 1월 4일 사육 중인 모든 소와 돼지에 1차 백신 접종을 했고, 1월 28일에는 2차 백신 접종까지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접종 후 한 달이 지난 뒤인데도 구제역이 발생한 것이다. 이젠 백신을 접종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아마도 지금 추세라면 전국의 모든 가축들을 다 죽여야만 구제역의 확산을 저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뿐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전북 익산에서 발생한 조류 독감 때문에 지금까지 가금류 525만(!!) 마리가 학살처분됐다고 한다. 지금까지 죽은 동물만 합쳐도 이미 850만 마리가 방역이란 이름으로 학살된 것이다. 850만 마리!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기에, 아마도 최소한 1000만 마리는 죽이게 될 것 같다. 1000만 마리!! 사람으로 치면 그 많다는 남한 인구의 4분의 1이다! 현재 인구 4명당 한 명을 죽이는 규모의 학살이 동물들을 상대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동물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종말이 아니고서야 이 짧은 기간에 어찌 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죽어갈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어도 운석 충돌로 인해 시작된 5번째의 대멸종기 때보다 빠른 속도로 동식물들이 멸종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6번째 멸종기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지구 아닌가? 멸종기의 어떤 시기에도 이처럼 빠른 속도로 이처럼 대대적인 죽음이 있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원래 전국토가 죽은 인간들의 묘지들로 채워져 가고 있던 곳이었지만, 이젠 학살된 동물들을 생매장한 거대한 무덤이 그 묘지 사이의 땅들을 메워가고 있다. 거기에 더해 매장당한 동물들의 피와 살, 분비물들이 곳곳에서 배어나와 그 처절한 학살의 후과처럼 전국의 땅과 물속에 배어들고 있다. 죽었지만 아직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중음신들이 떠돈다는 중천은 더할 것이다. 일시에 죽은 동물들의 혼백으로 중천은 아마도 출근시간의 끔찍한 만원지하철 이상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더구나 곱게 죽은 거라곤 거의 없이 대부분 난데없는 생매장으로 살해되었으니, 그 혼백들은 원한으로 쉽게 떠나지도 못할 것이다. 거대한 분노와 원한의 기운이 전국의 대지 위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건설업자로서도 결코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해본 거”라곤 그저 그것 밖에 없기에 세상을 그저 건설업자의 눈으로만 보는 ‘CEO 대통령’께서, 전국의 중요한 강을 공사판으로 만들어 미친듯한 속도도 콘크리트를 처발라대며 강물과 강가에 살던 수많은 생명들을 떼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죽어가는 생명들의 숫자는 생명으로 세어지지도 않기에 얼마나 죽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엄청난 속도로 죽어가고 있다. 눈빛이나 몸짓마저 남기지 못한 그들의 혼백들은 또 어디를 떠돌고 있을 것인가? 달래줄 이조차 없는 그들의 슬픔, 원한으로 인정받지도 못하는 그 원한들이 섞이지 않은 대기가 대체 이 땅의 어디에 남아 있을까?

이 처참하고 끔찍한 사태를 종말의 징후라고 생각하는 것을 그저 종말론적 사고나 종교적 심성 탓이라고 돌릴 수 있을까? 혹은 유치한 유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거기에 더해 계절의 모습을 바꾼 기이한 기후가 일상화된 세계, 그리고 날아가던 새들이 집단적으로 떼죽음을 당하여 하늘에서 쏟아지는 일이 반복되는 세계가 있지 않은가! 한쪽에선 정신없이 지구적 자원을 착취하며 돈을 벌지만, 다른 한쪽에선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고,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거대한 수의 사람들이 사람들의 시야에서마저 점점 사라져가는 세계가 있지 않은가! 자기처럼 남들도 돈이면 다라고 믿을 뿐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선 어떤 일이라도 별로 상관없다고 믿는 욕심 많고 어리석은 대통령과 거기에 한패거리로 달라 붙어 이권을 챙기려는 잔대가리의 졸개들이 미친 속도로 다그치는 것이라곤 해도,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저 참혹한 종말적 현상은 전 세계의 지구가 겪고 있는 이 거대한 종말적 사태의 한 징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G20의 순번제 의장국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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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세상에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위기감을 감지하지 않기는 어렵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간 끝나고 말 거야’라는 이런 위기감마저 없다면, 지금의 사태는 종말의 전조가 될 것이다. 종말의 전조든, 종말에 대한 위기감의 징후든 우리는 종말론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종말론을 피할 수 없는 시대, 어떤 식으로든 종말을 사유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그것이 아마도 종말론적 신학이 다시 사유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종말을 사유함으로써 종말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안이한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종말이라고 할 것도 없을 것이며, 그렇게 극복할 수 있는 위기감이라면 굳이 종말론이라는 극단적 형식을 빌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종말론의 시대가 맞다면, 우리는 종말을 종말로서 사유하고 긍정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종말이 종말인 것은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까.

사실 인간의 관점을 벗어나서 생각해보면, 지금 거대한 학살과 죽음이 눈에 보여 고통스럽겠지만, 역으로 이 대대적인 죽음으로 시작된 종말이 인간이란 종의 죽음으로 귀착될 것임을 안다면, 지구의 관점에서 그것은 어쩌면 모든 동물, 대다수 생물들의 멸종으로 이어지고 있는 이 위기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뜻하는 희망의 전조로 보일 것이다. 인간이야말로 6번째 대멸종의 원인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이제까지 존재해 온 종들 가운데 어떤 종도 멸종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한다. 지금 존재하는 모든 종들 역시 멸종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대신해 새로운 종들이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멸종이 모든 생명의 멸종이라도 되는 양 떠드는 것은 지구의 눈에는 가소로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내 몸에 사는 대장균들이 자신의 멸종이 내 몸의 죽음을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반대로 모든 동식물들을 멸종의 길로 몰아넣고 있는 이 치명적인 종의 죽음은 인간 아닌 다른 종들에게는 좀더 생명을 지속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인간이란 종이 어떤 식으로 멸종할 것인지에 따라 살아남는 것과 죽는 것들 사이에 다른 운명들이 분배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종말론의 시대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죽는 것이 그나마 다른 생명체들에게 민폐를 덜 끼치며 곱게 죽을 수 있는 길인지 하는 것 아닐까?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새로 태어난 생명들의 삶에 기여하고자 나라야마에 가는 길을 재촉했던 오린의 마지막이 서설의 축복으로 아름다웠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응답 3개

  1. 지나가다말하길

    그래서 저런 류의 영화들은 점점 세균쪽으로 수렴해 가는 것 같아요. 원폭 등에 비해서 다른 생명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인간만 데려갈 수 있을 듯 해서요.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V and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진보 뉴스. 진보 뉴스 said: [수유너머] 종말론의 시대, 종말의 사유: 1 작년, 아니 재작년에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의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활동가들과 인터뷰를 했다. 그때 프… http://bit.ly/f40pBo http://suyunomo.jinbo.net […]

  3. 찬돌말하길

    섬찟한 말씀인데요
    물론 그만한 각오는 하고 쓰시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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