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대학사회에서 유령은 누구인가

- 박정수(수유너머R)

지난 1월 3일부터 시작된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농성이 44일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싸움이 여느 노동운동과는 확연히 달라 보입니다. 맑스가 ‘공산주의자당 선언’에서 “유럽에 하나의 유령이 출몰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라고 했던 말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들의 결사체를 ‘유령’이라 불렀습니다. 자본의 실질적 생산자이지만 고정된 사회적 위치나 이름도 없이 그 존재조차 의식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유령성에 주목한 것입니다.

오하나가 보고한 ‘유령체험, 청소노동자로 하루나기’라는 말이 적실하게 웅변하듯, 청소노동자들은 유령이었습니다. 대학의 지식, 자본 생산에 꼭 필요한 공간을 창조하는 그들은 창고, 계단 밑, 벽 틈의 음습한 곳에서 먹고 쉬고 생활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도서관, 강의실, 복도, 화장실에서 그들과 마주치더라도 아는 체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실존하지만 없는 듯이 대해야 하는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존재와 비가시성 사이의 견고한 장벽을 깨고 그들이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을 유령 취급했던 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유령이 말을 하다니, 감히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하다니! 대학자본과 그에 동조한 교직원, 대학생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최대한 빨리 그 유령들을 다시 안 보이는 곳으로 밀어 넣으려 애씁니다.

홍대당국자가 청소, 경비노조원 전원을 해고한 것은 그들의 요구가 홍대자본에 심대한 부담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재단 적립금이 4천 8백억원으로 전국 3위에다 부동산 투기와 비자금 조성에 있어서 선두를 달리는 홍대자본이 겨우 140명의 임금인상 비용 때문에 흔들릴 리가 없습니다. 유령처럼 있어야 할 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서 실체를 드러낸 게 불쾌하고 괘씸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노동 계약과 협상의 주체로 인정하는 순간, ‘대학’이라는 유령같은 정체성 속에 감춰진 자신의 ‘자본성’이 드러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소위 비운동권 학생들이 홍대자본의 편을 드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ROTC 학생들이 교직원과 함께 농성장을 사찰하고, 노동자들의 두세 배 일당으로 대체근무를 하고, 학보사와 홍대방송국 학생들이 고소고발용 채증 사진을 찍고, 집회를 방해하는 등 ‘구사대’ 노릇을 한 것은 그들이 홍대자본의 편에 서 있음을 명확히 드러낸 것입니다. ‘진리와 양심의 수호자’로서의 대학생 이미지(물론, 그런 ‘대학생’의 이미지는 엄기호씨의 말처럼 386세대의 자기만족적 이미지에 불과하지만)를 기대하는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서 그들은 전술을 바꿨습니다.

홍대 정문 옆에는 단대학생회 명의로 “어머니 아버님을 지지합니다” 라고 쓴 플래카드들과 명의를 밝히지 않은 “아버님, 어머님과 소통하고 싶어요” “이제 우리가 지켜드릴게요” “차갑게 얼어붙은 손 우리가 잡아드릴게요”라는 플래카드, 그리고 총학생회가 단체명도 안 밝히고 흰 색 바탕에 검정 페인트로 휘갈겨 쓴 “오해 푸시고 저희의 진심을 알아주세요” “올해에도 저희와 함께 학교에 있어 주세요” 라는 글귀가 붙어 있습니다. 노동자라는 말 대신 “어머님, 아버님”이라 부르고, 뼈저린 각성 대신 “오해”와 “진심”의 “소통”을 말하며, 존중과 연대 대신 시혜와 보호를 운운하는 플래카드 중에는 속내를 드러낸 글귀도 있습니다. “진정한 어머님 아버님의 편은 홍익대 학생들입니다” 그러니 ‘외부세력은 나가라’, “해결이 목적인가 이슈화가 목적인가” ‘더 이상 학교 이미지를 훼손하지 말고 대학이 선정한 용역회사에 등록하라’는 것입니다. 학습권과 학교 이미지를 내세워 집회를 방해했던 초반의 입장과 바뀐 건 없습니다. 오히려 청소노동자들은 더 화를 냅니다. “교활한 놈들!” 처음부터 그들 비운동권 학생들이 원한 것은 대학의 ‘이미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홍익대학만의 이미지가 아니라 ‘대학’ 자체의 이미지 말입니다. 그 실체 없는 이미지가 대학자본과 청소노동자 간의 계급투쟁으로 깨져 버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학은 이미 대기업입니다. 거기서 생산되는 상품은 예비 노동자이며, 상품화된 지식이며, 대학의 서열화된 ‘상표’ 가치입니다. 지금의 대학은 안과 밖의 경계가 없습니다. 담장 밖의 경제논리, 정치적 갈등, 대중문화가 아무런 장벽없이 그대로 대학 안으로 들어옵니다. 외부 세력을 필터링할 만한 독자적인 문화와 진리체계를 형성하지 못(안)하고 있습니다. 엄기호씨의 말처럼 “대학생이라는 정체성 혹은 사회적 위치에서 대학생이 아닌 사람들과 별다른 경험이나 언어지금의 대학은 외부와 구분되는 어떤 내부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김현식의 글이 ‘낯 뜨겁게’ 밝힌 것처럼 대학교수의 정치적 발언을 문제삼아 징계를 하게 만든 것은 ‘학부모’입니다. 성인으로서의 대학생은 없고 부모의 말과 투자전략에 따르는 ‘민증 나온 청소년’만 있나 봅니다. 그래선지 홍대는 농성에 참여한 학생들의 부모에게 전화해서 자식 단속 잘 하라고 으릅니다.

그럼에도 학교당국과 비운동권 학생들이 “외부세력” 운운하는 것은 왜일까요? 여느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연대를 끊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대학’이라는 자본의 좀 특수한 속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대학은 자신이 자본(기업)이 아니라는 ‘교육 이데올로기’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자본으로 기능합니다. 그게 무너지면 사설학원에 흡수되고 말겠죠. 따라서 대학은 기업이 아니며 대학생은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데올로기, 대학과 기업은 뭔가 다르다는, 다른 대학과 우리 대학은 뭔가 다르다는 차별의 이념 같은 ‘상징자본’을 생산합니다. 실체성이 없다는 점에서 그 상징자본(이데올로기)은 오직 믿음으로만 유지되는 ‘유령’입니다. 대학은 청소노동자라는 ‘타자’의 유령과 함께 ‘자기’ 자신의 유령을 생산합니다.

영화 <디 아더스The Others>의 반전이 떠오릅니다. 유령이라고 여겼던 ‘타자들’이 실은 산 사람이고, 자신이 유령이었음이 드러나는 결말. 맑스가 공산주의자당 선언에서 유령을 거론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프롤레타리아라는 유령이 실체로 드러날 때 그들을 유령으로 간주해온 자본의 유령성(가상성)이 폭로됩니다. 대학당국과 비운동권 대학생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계단 밑, 벽 틈에 구겨 넣으려 했던 유령들이 노동자로서의 실체를 주장하며 뛰쳐나올 때 ‘대학(생)’은 실체 없는 유령에 불과하다는 진실이 폭로되기 때문입니다. 아주쪼록 이번 청소노동자들의 싸움이 ‘대학’과 ‘대학생’을 유령으로 드러내는, 나아가 우리 사회의 온갖 유령들을 퇴치하는 싸움으로 확전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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