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무서워하는 마을에서 무서운 마을로 – “여자와 퀴어들의 외치는 모임(女とクィアの「叫ぶ会」)”

- 신지영

집회에 가는 이유

고백하자면 일본에서 나는 소리 지르러, 심호흡 하러, 운동 삼아, 집회에 간다. 아마도 나는 스스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집회에서 함께 걷고 소리를 지르면서 느끼는 모양이다. 집회는 급히 잡히기 때문에 혼자 갈 때가 많다. 그렇지만 돌아올 때는 둘 셋이 된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면 마음에 안정감이 되살아난다. 집회는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자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고 보이고 들리게 하는 시공간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일본에서 내 건강에 가장 큰 보탬이 되었던 것은 집회였다. 그래서 나는 집회에 또 하나의 상상력을 더하고 싶어진다. 집회란 서로가 서로에게 들을 수 없었던 몸 속 깊이 숨겨진 목소리를 끄집어 내주는 친근하면서도 파격적인 코뮨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연말연시로 바쁘다 보니 집회를 가지 못한 날이 길어지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고 몸이 무거워지던 중 이치무라씨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여자와 퀴어들의 외치는 모임(女とクィアの「叫ぶ会」)”을 하자는 것이었다. 외치는 모임! 이건 완전히 나를 위한 집회잖아! 이치무라씨는 여성이고 홈리스이고 작가이다. 요요기 공원과 246 철로 밑에서 살면서 홈리스들 특히 여성 홈리스들과 함께 면 생리대 만들기, 그림 그리는 회, 물물교환 에노아루 카페(絵のある, 그림이 있는 카페라는 뜻)카페, 줍거나 받은 음식으로 홈리스들과 함께 밥을 지어 길에서 먹는 246키친 등을 해 왔고 하고 있다. 최근 수개월 간은 시부야에 있는 미야시타 공원이 ‘나이키 파크’로 재개발되고 유료화되려는 것을 막는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미야시타 공원을 지키는 활동에는 운동단체, 아티스트, 학자, 개인 참여자 등 다채로운 사람들이 참여했다. 미야시타 공원에 텐트를 치고 살기도 하고, 찻집, 영화제, 파티, 강연회 등의 활동이 이뤄졌다. 미야시타 공원은 점차 “싸우는 코뮨”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9월 24일 행정 대집행으로 활동가와 홈리스는 쫓겨나고 텐트와 벤치는 파손되었다. 현재 나이키 파크는 4월 오픈을 향해 공사 진행 중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여자’와 ‘퀴어’들의 “외치는 회”를 미야시타 공원 옆 육교에서 하자는 메일을 받은 것이다. 그 육교는 지금은 막혔지만 미야시타 공원과 연결되는 가장 큰 통로이다. 이번 모임은 회사 측이 “여성과 아이가 사용하기 어렵다. 무섭기 때문”에 공원을 재개발 해야 한다고 한 발언에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메일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여성과 아이들의 공포를 마주하지 않고 야숙생활자에게 돌려, 여성과 아이들을 야숙자와 대립시키”려는 논리에 반발하면서 “저주, 화, 한, 분노, 슬픔, 증오, 원망, 비방과 같은 소리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여성과 퀴어의 외치는 모임”을 연다고. “보다 큰 소리로, 보다 찢어진 소리로”

우리의 저항이 권력과 닮아 버린 것은 아닐까?

나이키 회사가 든 공사이유는 “여성과 아이의 권리”이다. 권력이 어느새 우리의 저항적 언어들을 차용하기 시작했다. 이 발언에서 ‘여성’과 ‘아이들’은 보호의 대상이 되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다. 반면 홈리스=남성이자 어른이 된다. 그러나 홈리스 속에는 적지만 여성도 있고 아이도 있다. 오히려 핵심은 왜 여성이 훨씬 더 심각한 빈곤상황에 있으면서도 여성 홈리스가 이렇게 적은가이다. 또한 그들은 “공공의 권리”를 증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시민권을 지닌 사람들의 공공이다. 이처럼 미야시타 공원의 싸움에서 기존의 가치들이 개발과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말로 이용되고 그 결과 마이너리티는 내부 분열을 겪는다. 여성은 홈리스와, 시민은 홈리스와 적대적인 듯이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야시타 공원을 지키는 활동 속에서 미야시타 공원은 아이들의 더 좋은 놀이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http://www.youtube.com/watch?v=Z_JWB8qaOJQ&feature=related)
미야시타 공원의 나이키화 반대에 참여한 「구멍을 파는 회(穴あきの会)」 「퀴어 페미텐트(クイアフェミテント)」들은 이 이러한 재개발 속에서 젠더의 문제가 재생산 되는 것을 질문해 왔다.

따라서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무엇이 여성과 아이를 보호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대체 무엇이 민주주의이고 무엇이 보호인가를 물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권력이 저항의 언어를 차용함에 따라, 어느새 우리의 저항이 권력과 닮아있을 위험성도 생겼기 때문이다. 기존의 인간의 보편적인 존엄성을 위해 만들어진 말들을 쓰는 순간, 그 말이 지닌 트릭에 걸려들고 만다. 그리곤 자신이 권력과 똑같은 짓을 해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될 때도 있다. 대체 이 트릭은 언제 일어나는 것일까? 이 가치들을 래디컬하게 재점검하기 위해서는 파격이 요청된다. 우리의 외침은 이 언어의 봉인을 깨기 위한 일종의 파격이었다.

시나리오에 파격을!

오랜만의 미야시타 공원이었다. 벌써 사람들이 미야시타 공원 옆 육교 위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리 밑으로는 시원한 8차선 도로에 차들이 싱싱 달렸다. 나는 차보다 빨리 뛰어 그들에게로 갔다. 오래동안 멈춰 있었던 것처럼 심장이 쿵쿵쿵 울렸다. 함께 “으아아악, 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어쩐지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았다. 미야시타 공원 봉쇄, 자살자 3만인, 등 사회적 이슈는 내 몸 구석구석을 조이고 막고 있는 답답한 부분들과 연결되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니, 이미 머리 속에 그러한 의미들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저 좋았다. 속이 시원했다. 함께 소리를 지른다는 고양감도 좋았다. 이미 목소리가 걸걸해진 누군가가 말했다. “소리를 지르더니 모두 좋은 얼굴이 되었다!” “속이 시원하다”는 둥 더 지르고 싶다는 둥 왁자지껄 떠들며, 아, 우리는 보고 말았던 것이다. 함께 소리를 지르고 어린애들처럼 환해진 서로의 얼굴들을.

사실 소리를 처음 질렀을 때 우리는 매우 놀랐다. 왜 영화에서 보면 여자들이 비명을 지를 때 소프라노로 “꺄악~”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가 내지른 소리는 남자나 동물 소리에 가까웠다. 일부러 입을 동그랗게 해서 영화의 비명을 흉내 내려 했더니, 소리가 크게 나지 않고 가슴도 전혀 시원하지 않았다. 누군가 말해다. “나는 소프라노 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기존 시나리오들은 우리의 외침조차 얼마나 왜곡시켰는지…이치무라씨가 저쪽에서 외쳤다. “외치는 것도 자주 해봐야 잘 할 것 같아요” 우리는 정말이지 소리쳐 본 적이 없었다. 한번이라도 저 뱃속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자신의 외침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날 우리는 그것을 함께 해 보았다. 부서질 듯 맑은 날이었고 바람이 강하고 추웠으며, 자동차가 지나가거나 바람이 불 때마다 육교가 미세하게 흔들거렸다.

이번엔 번갈아 한명씩 꽃과 천으로 장식된 깃발을 들고 봉쇄된 미야시타의 울타리 앞에 서서 소리를 지르기로 했다. 깃발을 들고 홀로 서니 다리의 흔들림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흔들리는 한명 한명이 “안전제일”라고 씌어진 봉쇄된 울타리 앞에서 온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얌전하게 생긴 수줍고 자그마한 분이 있어서 소리를 지를 수 있을까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권투선수처럼 발을 쿵쿵 구르더니 울타리 앞까지 한달음에 뛰어 가서는 “웃기지마!”라고 소리를 질렀다. 만약 우리의 외침이 100명이 되고 1000명이 되고 만명이 되었다면, 그 굳건한 벽도 꽃잎처럼 흩어져 내렸을 것이다. 아니 그날 조금은 그 벽이 부서져 내리는 것을 보았던가?

공공연히 고백하건데, 이 외침에는 비밀이 가득했다. 법은 아무리 좋은 법일 지라도 재판장으로 사람을 소환한다. 피해자이건 가해자이건 법원에서는 말해야 한다. 법원의 문법으로 법원에 먹히는 방식으로. 언어는 어떤 언어일지라도 오랜 전통과 문법 속에 갇히게 한다. 모국어이건 외국어이건 그 문법을 통해서 말해야 한다. 외침도 이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나는 “당신들이 방해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누군가가 살짝 “당신들”은 친절한 말이예요. “데메라”라고 해야지. 했다. 나는 외칠 때조차 외국인이 배운 착한 일본어 문법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냥 소리나 실컨 지를 걸… 후회했다. 그러나 외침은 법원의 증언이 될 수 없고, 절차를 무시하며, 문법을 파괴한다. 나처럼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도 소리를 지르려면 “비켜” 정도의 외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더욱 더 공공연히 고백하건대, 모두들 개인적인 답답한 순간들을 그 외침에 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외침은 정말이지 비밀과 잉여성으로 가득했다. 생각해 보면 비밀이 없는 존재들은 참으로 지루하다. 비밀이 없는 집회도 참으로 지루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비밀스러운 소리를 지르러 비밀스러운 소리를 들으러 집회에 간다.

무서워하는 존재에서 무서운 존재로

몇 가지 해프닝도 벌어졌다. 육교는 꽤 넓었고 우리는 15명 정도였기 때문에 통로는 충분히 확보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몇 명의 통행인이 지나가고 1시간쯤 지났나, 경찰이 찾아왔다. 경찰이 “뭘 하고 있는 겁니까?”라고 묻자 이치무라씨는 “그냥 소리가 지르고 싶어서요.”라고 귀엽게 말했다. 누군가가 “통행에 방해가 되진 않았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경찰이 “남자들 견학 금지”라고 씌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모여서 이상한 짓을 해서 무섭다”고 신고를 받았다고 했다. 우리는 “직접 말했으면 양해를 구했을 텐데..”라며 “신고한 사람이 남자예요?”라고 물었으나,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두렵다”라는 그 말이 뱃속 깊이부터 기뻤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존재’에서 ‘무서운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번 집회는 드물게 여성과 퀴어만 참여하도록 기획되었다. 남자는 견학도 금지되었다. 그런데 경찰과 옥신각신 하면서 그 이유가 비로소 이해되었다. 이 모임에 한명이라도 남자가 섞이면 그냥 ‘모임’이 되고 여자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 때로는 ‘평등’ 보다 ‘차별’이라는 말이 ‘개방’ 보다 ‘폐쇄’가 사태를 더 명확히 보여줄 때도 있다. “외침”을 들리게 하기 위해서 공통성의 범위를 선택하고 제한할 필요성도 발생한다. 왜냐면 평등을 말하면서 차별을 감추고, 개방을 말하면서 더욱 폐쇄적인 노동력 착취의 구조를 감추기 때문이다. 이번 집회는 홈리스 배제에 여성과 아이들을 이용하는 것에 문제제기를 하기 위한 것이자, 여성을 보호의 대상으로 만들고 홈리스를 남성화하는 문법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이 지닌 정치성은 지나가던 어떤 행인을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했다. 우리의 외침이 그들이 여성과 거리를 정의하는 시나리오를 파괴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상한” 우리를 신고했고 경찰은 이게 집회인지 아닌지 헷갈려 하고 있었다.

경찰과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늦게 꽃을 들고 나타난 한분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꽃을 꼭 부여잡고는 “으아아아아! ” 옥신각신하던 경찰이 놀라서 그녀에게로 갔다. 우리는 그녀에게 “경찰이 그러면 안된대”라고 꼬마 아이가 형이나 누나에게 이르듯이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 그래요? 몰랐어요…. ” 하곤 순진무구한 얼굴로 꽃을 부여잡고는 아이처럼 질문했다. “그럼요, 이 거리가 경찰 거예요?” 그러자 경찰이 그런 말이 아니라면서 마구 화를 내기 시작했다! 오 나의 비밀스럽고 두려운 그녀들의 변신술! 그러자 그녀는 침착하고 순진하게 “미안해요. 몰랐어요. 그냥 소리가 지르고 싶어서요” 라고 했고. 우리는 그녀를 둘러싸곤 “경찰이 그러면 안된대. ” “경찰이 그러잖아…”라고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과연 무엇이 무섭고 무엇이 위험한 것일까? 홈리스를 내쫓고 만들어진 코뮨을 파괴하면서 나이키 파크를 만드는 다국적 기업과 국가권력인가, 아니면 홈리스인가? 꽃을 들고 소리를 지르는 여자와 퀴어들인가 아니면 거리를 관리하는 사람들인가? 홈리스를 ‘무서워한다’고 정의된 여자들은 소리를 지름으로써 그들 스스로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비명”이라는 두려워하는 소리가 아니라, “외침”라는 두렵게 하는 소리로. “두려워하는” 수동태가 아니라 “두려운” 능동태로. 그러므로, 우리를 두려워하는 그대들, 당신들은 누구인가?

어둠 속의 어둠이 다른 어둠과 동거하는 방법

홈리스 배제의 이유로 ‘여성과 아이들의 안전’을 들고 있듯이 “미야시타 공원의 나이키화”를 정당화하는 가장 큰 논리는 “공공권”이다. 그러나 ‘공공’을 정하는 건 누구일까? ‘공’이란 무엇일까? 미야시타 공원의 활동은 작년 여름을 기점으로 새로운 단계로 들어선 것이 확연히 보였다. 텐트를 치고 상주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라는 아티스트 단체가 적극적으로 활동에 합류했다. 미야시타 공원 안에 공동경영 <찻집>이 들어섰고, 채소를 키우거나 강연회 음악회 영화제 등의 이벤트도 봇물 터지듯 이루어졌다. 처음엔 공공의 장소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했던 이 활동이 이제 “공공의 장소 그 자체”의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점거운동은 대개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나는 경우에 일어난다. 그러나 미야시타 공원은 원래 소유자가 없던 곳에 여러 형태의 주거가 형성되었다. 그곳은 이미 다채로운 실험이 이뤄지는 마을이었다. 당연히 동시에 이 활동은 ‘코뮨’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아티스트들이 공원을 점거한 경향도 있지 않을까? 투쟁이 아니라 표현에만 집중한다. 싸우의 방식이 애매하고 나약하다 등의 이야기도 돌았다. 아마도 9월의 행정대집행을 막지 못했던 까닭에 실패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가 이야기되었으리라.

한 인터뷰에서 이치무라는 미야시타 공원은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매우 불가사의한 공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홈리스만이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와서 사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여러 가지 권력관계가 생기기도 하고, 정말 살 곳 자체가 없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물음이 되기도 하고, 공원이 무엇인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분리가능한가 등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또한 그는 소유와 점유의 문제에 대해서 인간이 육체를 갖고 있는 한 살아가기 위해서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나, 어떤 공간에 더 애정을 갖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말한다. 문제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이러한 다양한 문제를 이야기하고 공감하면서 공간을 함께 열어갈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치무라씨와 함께 활동하는 표현가이자 야숙생활자인 오가와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티스트들은 처음에는 공공을 위한 운동으로 접근했지만 점차 점거의 정치적 의미, 함께 생활을 만들어간다는 의미, 새로운 표현 등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그런 활동은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확했다고 강조한다. 또한 의식주의 공간이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공권’과 홈리스나 자신처럼 생활 근거 없이 여기서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공권’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공유지니까 점유하면 안된다고 말하는데, 그들도 이미 돈을 내고 자신의 집을 전유하고 있는 것 아닌가?” 공원은 살 곳이 없는 사람들이 점유의 형태로 삶의 공간을 확보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중요한 장소라고 한다. “공원에 노숙하는 것은 공유와 사유의 장소가 겹쳐진 상태”이며,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최근에는 조심하는 점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카페라는 말 대신 찻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차는 셀프 서비스이다. 공원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차를 준비하게 되면, 주인과 손님 관계가 되고, 밖에서 사람들이 오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예는 공간이 어느 순간 ‘폐쇄적인 소유’의 형태로 변해버리는가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이처럼 미야시타 공원의 활동은 정확히 ‘마을 만들기’ 활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코뮨의 문제에 대해서 사유와 공유의 문제에 대해서 깊고 구체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실험 삶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모두 건드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순간에 행정 대집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그러나 미야시타 공원을 지키는 활동은 여전히 마을 만들기에 관련된 많은 질문들을 던져준다. 우선 이것이다. 고정된 장소성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어떻게 마을 운동을 지속할 수 있을까?

나의 비밀스럽고 무서운 마을들

정말이지 나는 이 글을 ‘공’과 ‘사’에 대한 이 감각을 새롭게 만들 필요성을 느껴서 쓰고 있다. 이는 사건의 순간과 지속적인 일상이 어떻게 겹쳐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또한 국제적인 좌파적 코뮨이 민족적이고 내밀한 공동체주의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모든 질문과 실험을 담고 있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래디컬한 질문과 표현의 파격, 그리고 어떤 섬세한 지속성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림자이다. 그림자 속에 다시 생기는 그림자이며, 그 그림자 각각이 지닌 농도와 색감의 차이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둠이다. 어둠 속의 어둠을, 코뮨을 분열시키거나 에너지를 약화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다.

우리는 제국을 살았고 살고 있다. 저항의 언어를 권력이 흉내내고 우리의 언어가 어느새 권력의 언어와 닮아있는 제국. 그러나 어디에나 제국이 있듯이, 어디에나 제국의 틈새, 유동하는 마을들이 있다. 여성과 퀴어들의 외치는 모임도 그 순간이 하나의 마을이었다. 미야시타 공원을 지키기 위한 집회에 가면 늘 먹을 것, 변장술, 소리, 꽃이 있다. 여자들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먹을 것을 꺼낸다. 오니기리, 홍차, 녹차, 오키나와 과자, 소리를 지르던 날도 먹은 것들이다. 그날은 티셔츠도 하나씩 나누어 가지면서 다시 모여 소리 지르기로 약속했다. 알록달록한 옷들과 가방, 꽃으로 장식한 깃발이 사람들이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린다. 나는 내가 본 비밀스럽고 풍성한 이 제국의 틈새들을 내가 사는 이곳으로부터 풀어내 우주 어딘가의 작은 섬, 모임, 거리 순간들로 흘려 보내고 싶다. 그것이 제국의 틈새를 확 열어젖히고, 작은 마을들의 네트워크가 되기를 꿈꾼다.

제국은 작은 마을들을 파괴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미야시타 공원 봉쇄는 내가 경험했던 마을들의 이주와 겹쳐진다. 그럴 때마다 꼭 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마을 옮겨심기”. 작은 씨앗들을 담아 “미야시타 마을” 이라고 써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에 씨앗을 심으면서 행진하는 것이다. 만약 제국이 제 1의 미야시타를 봉쇄했다면, 제2 제3의 미야시타를 우리의 상상 속에서 먼저 만들어 가면 된다. 함께 외치던 날, 미야시타는 분명 우리의 얼굴에 우리의 외침 속에 있었다. 앞으로 연재할 ‘마을만들기Ⅱ’에서 쓸 글들은 ‘마을’이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아직 이름은 없지만 이미 우리 옆에 있는, 비밀스럽고 무시무시하게 풍성한 마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응답 11개

  1. 이경말하길

    낙타님 글 잘 읽었습니다 ^^
    그동안 기다렸는데 말입니다!
    미야시타 공원의 소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가지 일이 많군요…
    글 블로그에 담아갈게요. 고마워요

    • 낙타말하길

      이경님,

      잘 지내요? ^^

      일본에서는 반가웠어요!

      이경님이 활동하시는 공간은
      점점 더 풍성해지고 있나요?

      이제 봄인데 새로운 일들도 시작하시길 빌게요!

  2. 디온말하길

    행정대집행이라니… 끔찍하군요. 그런데 이 글을 읽다보니, 그 곳에서 한 번 살아봤더라면- 하는 욕망이 전염되는데요? ㅎ
    개인적으로는 섬세함… 그리고 그림자와 어둠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시절인데, 좋은 글 고마워요.

    • 낙타말하길

      디온,

      너무 보고싶다!

      대추리에서 너와 함께 했던 여러 순간들을 이곳에서 만난다. ^^

      무엇보다 건강해야 해!

  3. 애독자말하길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그런데 미야시타 공원과 연관된 youtube동영상 링크가 잘못된 것 같네요.

    주소를 복사해서 들어가봤는데 영상이 안나오네요.

    • tibayo85말하길

      영상주소를 다시 고쳐 넣었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4. 솔아말하길

    재미있는 ‘모임’에 대한 좋은, 통찰력 있는 글이네. 음, 지영 상, 일본에서 잘 지내고 있군.^^

  5. 낙타말하길

    하나, 오랜만, ^^ 읽어줘서 고마워요. 근데 소리지르는 회, 해봐. 무지 재밌고 속이 시원해! ^^

    • 들사람말하길

      좋은 글 잘 읽었구먼. 어둠 속 어둠을, 어떤 말걸기로 드러낼 수 있겠느냔 얘기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오네그랴. 지역과 일상에 어떻게 ‘개입’할 거냔 물음과 맞닿을 수밖에 없어 보여 더 그렇잖나 싶네.

      그나저나, 요즘도 잠이 마니 부족한감?ㅎ 논의 좀 할 게 있는데.. 글타고 떨고 있진 말고, 메일 보낼 테니 반응 좀 해 주셩.

  6. 하나말하길

    와 재밌겠다!!!!!! 멋지다 !!!!!!

  7.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Heekyoung H. Oh, 진보 뉴스. 진보 뉴스 said: [수유너머] 무서워하는 마을에서 무서운 마을로 – “여자와 퀴어들의 외치는 모임(女とクィアの「叫ぶ会」)”: 집회에 가는 이유 고백하자면 일본에서 나는 소리… http://bit.ly/h4fEuG http://suyunomo.jinbo.net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