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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반시대

떠나온 자와 떠나는 자들 1

- 신지영

– 3월 11일 일본 대참사, 그리고 이동과 만남의 문제-

# 세계일주하는 재난

3월 11일 이후 일본은 전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28일 현재 행방불명자 포함 사망자는 2만 8000명을 넘는다. 후쿠시마의 토양은 말할 것도 없고 근해의 방사성 물질 수치는 기준치의 1,250배에 달해 일본산 수입품에 대한 각국의 규제는 강화되고 있다. 2호기 물웅덩이에서는 기준치 10만배가 넘는 방사성 요오드가 검출되었다. 그러나 과연 이번 대참사는 일본만의 문제일까? 쓰나미는 동북 지방에 이어 타이완과 하와이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줬다. 23일 경 방사성 물질은 세계 일주를 해 미국과 중국을 걸쳐 한국에 도달했다. 이번 대참사는 전 세계가 공기, 물, 먹거리로 연결되어 있음을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3월 11일 2시 45분에 나는 도쿄 내 방에 있었다. 똑바로 서 있기 힘들 정도의 흔들림으로 방이 난장판이 되었지만, 지진을 별로 경험한 적 없는 나는 ‘지진은 다 이런 건가…’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가는 오후쯤 가족과 친구들의 전화와 메일을 통해서야 실감했다. 곧 전화는 불통되었고 며칠 뒤부터 귀국행렬로 공항은 포화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외국인들의 대규모 이동은 위험지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스스로 “외국인”임을 증명하는 것이었지만, 반면 일본과 한국이 가족, 친척, 친구 등 수많은 인간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사촌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언니, 요즘 매일매일 일본날씨랑 풍향이 9시 뉴스에 나오잖아! 이마트 해외배송량이 2배나 증가했대” 언니는 걱정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얘, 도쿄도 후쿠시마에서 그리 멀지 않아 위험하다며. 요즘 일본지리 공부 확실히 하구 있잖니?” 한국인들은 이제 “해일” 대신 “쓰나미”라고 말하며, 후쿠시마가 도쿄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안다. 이런 소소한 걱정과 위로들은 일본에 대한 감각을 바꾸면서 일본과 한국 사이에 다양한 연결선, 더 정확히는 생명선을 만들어내고 있다……..

……라고 말하기에 앞서, 마음이 아프다. 이 글은 상황을 전달하고 연대를 호소하기 이전에, 추위와 방사능과 피난생활에 고통을 받고 있는 분들, 가족과 집과 마을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씌어져야 한다. 그들은 내 친구의 친척이거나 친구이거나 가족이기도 하다. 위로는 국가적 차원의 더딘 지원이나 후쿠시마 원전을 냉각시키는 일에 소방대원을 내몰면서 영웅시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이길 바란다. 한 마을 깊숙이에서 비어져 나오는 말에 귀 기울여 밖으로 나르고, 그 마을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샛길들에 힘을 불어넣어 촘촘한 생명선들이 무수히 연결되길 바란다.

# 대참사 속, 만남의 중요성

지진이 있던 다음날 계속되는 여진에 불안해 하다가 사람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후쿠시마 원전 1호기 폭발 소식을 들은 것은 4시경 그 카페의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황급히 집에 돌아가려는 나에게 주인 아주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나가려구요?” 12일 저녁부터 마스크 쓴 사람이 늘었다. 슈퍼마켓의 식료품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거리에는 “절전”을 외치는 활동가가 등장했다. 그렇지만 14일경까지 도쿄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13일에 나는 마스크도 없이 친구들을 만나 피폭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다시마를 나눠먹고 “환경에 좋은 원자력 발전” 따위 다 거짓말이었다는 둥 정부에 대한 뒷담을 나누곤, 안정된 기분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나누고 이야기한 것은 공포와 불안을 안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쇼핑몰 휴점

2주간 정지되었던 미즈호 은행

그러나 14일 이후 상황은 돌변했다. 1호기에 이어 3호기에서도 수소폭발이 일어났고, 14일 오후부터 2호기의 연료봉이 노출되기 시작해 방사성 물질이 대량 방출되기 시작했다. 14일경부터 도쿄 일대를 5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순환 정전이 실시되었고, 그 부작용으로 갑자기 전철이 서거나 정전이 되었다. 정전이 돌연 취소되어 급히 문을 여는 가계도 있었다. 정전이 되건 안 되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여진은 하루에 1~2차례 일어나서, 별 것 아닌 흔들림에도 몸을 움츠리며 생각했다. “또 지진인가?” 피난소 생활에 대한 보도가 본격화되면서 야외 모금운동이 시작된 것도 이쯤이었다. 도쿄도 방사능 공포에서 안심할 수 없었으므로 외출을 자제해 달라는 보도가 있었다. 물, 쌀, 라면, 초코렛, 휴지, 생리대, 마스크 등이 동이 났고 그나마도 30분쯤 줄을 서야만 살 수 있었다.

늘어선 줄

물 가판대 매진

14일 밤에서 15일을 기점으로 온갖 모임이 취소되기 시작했고, 유학생들은 본국이나 간사이 지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14일에 일본 주재 프랑스인에게 대피령을 내려졌고, 미국유학생들은 미국 본교로부터 대피지시 메일을 받았다. 일본정부를 믿고 도쿄에 머물러도 괜찮을지 헷갈리고 불안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대피하거나, 집에 틀어박혔다.

15일은 한달에 한번씩 내방에서 하는 연구회 날이었다. 그 전날까지만 해도 이런 때일수록 서로 모여 정보를 나누고 도움이 되는 활동방식을 찾고 사상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15일 경부터 도쿄의 세슘 농도는 급격히 상승하여 “외출자제” 보도가 내려진 상태였다. 나는 사람들을 집으로 부르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한명한명 전화를 걸어 의견을 듣기 시작했다. 간사이 지역으로 가거나 가족과 집에 머물고 싶다는 의견이 절반, 이런 때일수록 만나야 한다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그러나 점차 상황이 악화되었고 오기로 했던 사람들도 절반의 절반으로 줄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정보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만이라도 모이기로 결정했던 것은, 진위를 알 수 없는 보도 속에서 모두 각자의 방에 갇혀버리는 게 더 문제가 아니겠냐는 연구회 멤버 중 한명의 말이 지닌 무게감 때문이었다. 정말 그러했다. 13일까지 공포와 불안이 그나마 해소될 수 있었던 것은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사능 물질의 공포는 모두들 집 안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나 구호물자가 도착할 수 있는 길을 내고 피해지와 외부를 연결하는 것이 곧 생명과 직결되는 것처럼, 대참사를 이겨내는 힘은 ‘만남’과 ‘이동’의 자유라고 느꼈다.

# 마을에서 떠나온 자와 마을에서 떠나는 자.

연구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멀리 떠나자. 방사성 물질에 대처할 수 있는 소소한 정보를 교환하자. 우리가 힘을 합해서 도울 일이 있을지 논의하자. 그러나 첫 번째 이야기부터 민감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유학생이나 단기 체류자에게는 다소간의 망설임은 있을지언정 피난하는 것이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고 대부분이 귀국한 상태였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친척, 가족, 친구들이 있는 일본태생 거주민이 ‘대피’에 대해서 갖는 감각은 단기 체류자와 달랐다. 나는 “공동체와 함께 죽음을~”처럼 끔찍한 도덕은 없으니까, 갈 곳이 있다면 간사이나 후쿠오카 쪽으로 잠시라도 피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이야기 했다. 연구회에 참여하기 위해 단기간이나마 후쿠오카로 갈 예정이었던 나로서는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동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었다. 일본 서쪽이나 남쪽, 혹은 해외에 연고가 있는 자와 없는 자, 이동할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등 제각각이었다. 대참사와 대이동의 순간엔 각각의 고향, 국적, 민족성, 경제적 능력 등이 드러났다. 이동이 절실해질수록 모든 발언에는 그 차이들이 복잡 미묘한 배경음으로 울렸다.

몇몇에게는 “가능한 한 멀리”라는 내 말이 “외지인”의 가벼움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우리 연구회에 가끔 참여하는 친구 한명은 쓰나미로 휩쓸려간 마을 출신으로 마을사람 대부분이 친구이거나 친척이라고 했다. 마을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다 도쿄로 공부하러 떠나는 그녀를 마을 사람 전체가 배웅해 주었다고 했다.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몸 전체는 피해 마을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 “가능한 한 멀리”는 불가능했다. 그녀는 “가능한 한 가까이” 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서는 살아갈 길이 막막한 노인들에게 아무리 방사능의 오염이 있다고 해도 ‘피난’은 쉬운 결정이 아닐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에 깊은 연고가 없을 뿐 아니라 지진을 겪어본 경험조차 없는 단기 체류자의 불안감은 일본 태생의 사람들보다 컸다.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을 줄 친구나 가족, 친척이 적다는 게 불안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 빨리 떠났을 것이다.

대참사와 대이동이 일어날 때 에스닉한 감정은 폭발한다. 그러나 그 에스닉한 감정이란 한 개인이 그 마을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얼마나 보호받을 수 있는가 하는 삶의 실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내 맘 속에도 다음과 같은 물음이 일어났다. 물이나 생필품이 모자랄 때, 나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사람이 있는가? 일본 정부는 나를 보호해 줄 것인가? 이처럼 ‘이동의 가벼움과 무거움’은 그 마을이 자신의 삶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가와 직결된다. 내 메일엔 “오사카로 와라” “한국으로 돌아와라”라는 말이 빗발치며 나의 태생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고 나는 정말이지 어딘가로 피하고 싶었다. 반면 마음 한구석에는 이곳을 떠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깊이 자리 잡았다. 이곳을 떠나는 것은 내가 이 마을과 맺는 연결고리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친구들을 믿지 못함으로써 친구들의 신뢰를 잃을까봐 두려웠다. 나는 더 좋은 삶을 찾아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싶었다. 이때부터 나는 이번 대참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이동, 애도들, 이 복잡하고 솔직한 이름 없는 감정들은, 오직 픽션으로만 씌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뉴스는 사망자 전체를 통계숫자로 보여주고 우리는 그것을 ‘일본인 사망자수’라고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그 사망자 수에는 외국인, 재일조선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16살 때부터 종군 위안부로 고통을 받았던 송신도 할머니는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18일 미야기현 대피소에서 생존이 확인되었다. 또한 우리는 자연재해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동조건’을 생각해 보면, 여성과 남성, 노인과 아이, 부자와 빈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 피해를 입은 마을에는 과연 누가 살고 있었는가? 누가 어떻게 대피했고 누가 왜 죽음을 맞이했는가? 보다 구체적인 물음과 구체적인 애도가 필요하다. 다시 한번 가족과 집과 마을을 잃고 정성껏 기른 채소와 우유를 버려야 했던, 그리고 그 마을과 연결된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애도를 보낸다. 그 옛날 어떤 마을에서 떠나와 이와테현, 미야기현, 아키타현, 후쿠시마현 등에 정착해서 살아왔던 그 모든 세월들과, 그 마을 전체의 힘이었던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떠날 수 있는 자가 떠날 수 없는 자에게 바치는 애도가 아니라, 떠나온 자가 떠나갈 자들에게 바치는 공감의 애도를.

응답 1개

  1. cman말하길

    실제 접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부로 말을 하기가 무겁습니다. 타인의 경험과 상황을 마치 영화속의 한장면처럼 무책임하게 받아 들이게 되는 자신을 보며 한계를 느낍니다. 엄청난 실로 영화석의 한장면이라고 밖에 표현 가능한 상황에서 침착하게 소통하고 있는 모습에서 깊은 감사와 위로를 받습니다. 좋은 글 빠뜨리지 않고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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