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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보도와 인종주의와…(原発報道と人種主義と…)

-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히토츠바시 대학원)

 일찍이 이 정도로 미디어의 공과(功罪)가 부각된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이 정도로 미디어가 생활의 기반, 더욱이 생명의 존속 가능성 자체와 떨어 질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실감했던 적이 있었을까? 이번 토호쿠 칸토 대지진으로부터 1개월이 조금 지나, 방사선의 중심 피해지와 비교해 볼 때, 도쿄라는 도시에 생활기반을 둔 필자의 시각에서 볼 때, 우선 떠오르는 것은 이것이다.
일본정부 및 도쿄 전력은 정보공개가 늦었던 것에 대한 국내외로부터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신속하게 정보를 공개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사람들을 사실로부터 멀어지게 해, 컨트롤하려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바로 방금 전(4월 23일 현재)의 정보이지만, 복수의 프리 저널리스트들이 트위터로 보내준 바에 따르면, 4월 25일부터 매일 저녁 5시에 도쿄 전력, 원자력 보안원, 원자력 안전위원회, 경제산업성, 문부 과학성, 관저가 도쿄 전력 본사에서 모여 합동회견을 연다고 한다. 그 회견에는 등록되지 않은 프리 저널리스트가 배제된다. 사고발생 이후 도쿄전력과 보안원의 회견을 편집․검열 없이 Ustream 위에 송신해서, 기자회견이라는 이름의 거짓말과 장치를 역력히 보여 주었던 Independent Web Journal(대표는 이와카미 야스미씨, 청취자는 매회 약 1만인에 달한다)는, 이 합동회견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에세이에서 문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피해쇼크 이상으로, 그에 이어졌던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의 보도방식과 인종주의의 교점에 대해서이다. 현재 진행형의 사태이자 자기자신도 크건 적건 당사자인 사태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객관적일 수는 없다.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을 테지만 이해를 부탁드린다.

기자 그룹과 보도규제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지진직후부터 어쨌든 정보를 모으면서 나날을 보냈다.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을 자는 시간 이외에는 그야말로 혈안이 되어 탐했다. 한신 아와이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 칸토대지진(関東大震災), 체르노빌, 스리마일 등 많은 아날로지가 난무했지만, 그 어느 것도 실감으로부터 멀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공무원과 어용학자가 “안전”을 반복할 뿐이어서 오히려 공포를 부채질했다. 신문은 텔레비전에 비해 다소 정리되어 있는 정도였다.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은 Ustream에서 거의 매일 중계되었던 원자력 자료 정보실의 외국기자 그룹 대상의 회견뿐이었다. 거기에서는 원래 도시바(東芝)의 원자로 설계전문 기술자였던 고토 마사시(後藤政志)씨가 처음으로 세상에 본명을 밝히고 기술자로서의 반생을 스스로 뉘우치면서 냉정하게 현재상황과 앞으로 닥쳐올 가능성이 있는 위기를 손에 들어오는 얼마 안 되는 정보를 가능한 범위에서 판단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이 모습은 주류의 거대 미디어에서는 보도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보도상황에 편차가 생기는 것일까? 4월 22일호 주간 도서인(週刊読書人)의 인터뷰에서 프리 저널리스트인 우에스기 타카시(上杉隆)씨는 기자 그룹의 폐해에 대해서 강조한다. 기자 그룹이란 텔레비전이나 큰 신문사 등 주류 미디어의 저널리스트로 구성된다. 덧붙이자면 앞서 기술한 외국인 기자 그룹은 해외의 주류와 프리를 전부 포함한 저널리스트 대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려고 하는 기자 그룹과는 구별된다. 그들, 그리고 그녀들은 정부의 공관청이나 대기업의 발표장에 있다가 기사가 공표할 때 질문 등을 하는데, 진작부터 그 폐해가 지적되어 왔다. 그 폐해는 주로 정부나 대기업과의 담합 및 유착, 그리고 그 체제가 양성하는 비판적 시점의 결여이다. 그들, 그녀들은 일부의 보도기관을 제외하면 비판적인 시점을 들여오지 못하고 정부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여 흘려보낸다. 혹은 프리 저널리스트가 한 질문의 공로를 철저히 자신의 공로인 것처럼 발표하거나 해 왔다. 우에스기씨에 따르면 이 기자 그룹이라는 특이한 기관은 제2차 대전 전부터 존재해 현재도 변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 70년 전 태평양 전쟁 말기의 대본영 발표와 완전히 같은 구도가 노정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플레이어는 바뀌었지요. 당시는 토조 내각(東條内閣)과 군부, 신문이었습니다. -중략- 이번 주역은 간 내각(菅内閣)과 도쿄 전력, 그리고 텔레비전 등 매스컴입니다.” 우에스기의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 이번 사태에 한정하지 않아도 특히 2002년 평양에서 열린 조일 수뇌회담(日朝首脳会談) 이후, 일본의 매스 미디어에 의한 보도가 대본영 발표와 매우 흡사해져가고 있음을 이미 느끼고 있던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이번 사태에서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해진 것은 매스미디어가 그 핵심에 기자 그룹이라는 군국주의의 유제(遺制)를 온존시킨 결과, 비판적 능력을 전면적으로 결여하고 있음이 공공연한 사실이 된 점일 것이다.

인종주의/국민화의 추진력으로서의 원자력 정책

 이번 사태로 원자력 발전소는 그 하나하나가 어찌할 방도가 없는 폭탄이라는 것이 뜻밖에 증명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원자력 발전소가 이 좁은 섬에 어째서 54기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정부 및 전력 회사가, 반핵운동 및 원전 계획 예정지 주민이 꼼짝 못하도록 하는데, 그리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쇠뇌 시키는데, 성공해 왔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전 후쿠시마현 지사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久)의 말에 따르면, “이 원자력 발전소는 현이나 주민이 의사결정 프로세스에 참가하지 못하는 독재국가와 같은 국책”(「報道特集」、TBS、2011年3月26日、카네히라 시게노리(金平茂紀)씨의 코멘트)이며, 이 “성공”을 매개해 온 것이 매스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의 역사적 경위를 더듬어보면, 냉전초기의 일미동맹과 매스미디어의 관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미소가 핵개발 전쟁을 적극적으로 시작했을 무렵, “원자력 평화이용”을 획책하고 있었던 미국은 그 동맹국인 일본에게도 차기 에너지로서 원자력을 추진하도록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 상대는 정치가나 공무원이 아니라 요미우리 신문사(読売新聞社) 사장인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郎)였다. 원자폭탄 투하장소였던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더해 1953년에는 비키니 환초에서의 수폭실험 때문에 어선 제5후쿠류마루(第五福竜丸)가 피폭당한다. 이에 높아져가는 반핵여론을 억누르기 위해, 쇼리키는 핵의 안전성을 호소하는 회사를 들어 어필에 전력을 기울였다. 요미우리는 당시 약 300만부(현재는 약 1000만부)를 자랑하고, 텔레비전에서 민간방송을 최초로 시작했던 일본 텔레비전(日本テレビ)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경위에 관해서는 「원자력 발전소 도입의 시나리오 ~ 냉전하의 대일 원자력 전략(原発導入のシナリオ ~冷戦下の対日原子力戦略)」、NHK、1994年을 참고). 게다가 쇼리키는 1925년의 칸토 대지진 당시의 경찰청 장관이었고,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퍼뜨려 조선인 학살이 확산되는 데 관여했다고 이야기된다. 이 식민지주의/레이시즘의 역사 속에서 피로 얼룩진 인물이, 제 2차 대전 후의 일본 매스미디어의 중추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원자력 추진을 담당했었다는 점은 기억되어야 한다.
 

계속되는 “레이시즘”: 원전 노동과 오키나와

 이 인물에 체현된 식민지주의/레이시즘/원자력 추진의 교점이 굴절되어, 현재에도 확산적인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이는 예를 들면 원전 노동자에 대한 대우와 일미군사동맹 하의 오키나와에서 나타나고 있다. 원전 노동자는 현재 일본에 50만 명이 있다고 한다. 그 현상은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카마나카 히토미(鎌仲ひとみ)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롯카죠 마을 랩쇼디(六ヶ所村ラプソディー)」(2007年)에 의하면, 아오모리현(青森県) 토마리마을(泊村)에서는 원자력 연료 재처리 시설의 방사성 물질을 포함한 오염된 물 때문에 어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원래 어부였던 그 지역 사람들은 일자리를 위해 항상 어쩔 수 없이 피폭을 당하는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피폭 노동자는 결혼, 재취업 차별 등과도 무관하지 않고, 일생 피폭자로서 낙인찍힌다고 한다. 원전의 존재 자체가 빈곤을 낳고 원전 노동의 차별을 낳는다(沖縄タイムス4月22日、写真家樋口健二氏の発言).
또한 원자력 정책에서 미국과 일본 간의 긴밀하다고 할 협력 관계는 이번 미군에 의한 피해지역 지원활동, 이른바 “친구 작전(トモダチ作戦)”에 의해서 여실히 그 내막의 공허함을 드러냈다. 재일 미군은 일부러 후텐마기지(普天間基地)의 고정화를 강조하고(실제로 요코스카(横須賀) 기지는 비어있었다는 소문이다) 본사의 신문은 이것을 기회로 재일미군과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했다(読売新聞3月22日社説、朝日新聞3月23日, 자세한 내용은 神保太郎,「미디어 비평(メディア批評)」『世界』2011年5月, 210쪽 참고). 이 “부흥지원”이라는 이름의 프로파간다(新城郁夫「沖縄タイムス」3月22日)의 조정역할에 발탁된 사람이 올해 2월 초에 “오키나와인은 갈취하고 등쳐먹는데 명수”이라고 발언해 국무성에서 경질시켰던 케빈 메아(2006~9년까지 주 오키나와 미총영사)였다. 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연극에도 불구하고, 올해 3월 30일, 정부는 재미군 주둔경비부담(在日米軍駐留経費負担, 소위 “배려 예산”)을 5년간 계속(매년1850억엔)하기로 결정했다. 어찌나 돈이 드는 친구인지! 4월 22일에는 헤노코(辺野古) 미군기지가 올해 9월에도 강행된다는 것이 누설되었다. 또한 작년 12월 말부터 올해 2월말에 걸쳐, 오키나와 방위국은 대량의 인원을 동원해서 많은 주민 및 지원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마을(東村) 타카에(高江) 숲에 Osprey 배치가 예정된 헬리포트 건설을 강행하려고 하고 있다.
기존의 기지를 반환할 예정도 세우지 않은 채, 새로운 기지를 오키나와에 강요하면서 형편이 좋을 때만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일본) 본토의 담론은, 수백 년 이상에 달하는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의 표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이 “본토의 소리”는 사람들의 이의신청 소리를 압살하는 미일 양 정부의 합작 작전과 공범관계에 있다. 이것은 또한 정부, 도쿄전력, 미국의 밀의 하에서 한국이나 중국 등의 이웃 국가와 상담도 없이, 고농도의 방사능 오염수를 공동 해역에 방출하는 범죄행위에 대해서(후쿠시마(福島), 이바라키(茨城) 두 현의 어민을 걱정하는 소리가 있다고는 해도), 일본 국내에서는 그다지 추궁하는 소리가 높지 않았던 것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며

 미디어 아티스트 일 커먼즈(오다 마사노리小田マサノリ)씨의 블로그(4月9日)에는 이하와 같은 후쿠시마 여자 고등학생이 쓴 것으로 보이는 편지가 게재되어 있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하고 싶다. 쓴 사람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글 제목은 “진실”이다.

도와 주세요. / 후쿠시마현 미나미소마시(南相馬市)의 여자고등학생입니다. /저는 친구들을 쓰나미로 잃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부모님을 잃었습니다. 저의 둘도 없는 친구는 미나미소마시에서 가솔린이 없어서 피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전화나 메일로 밖에 격려할 수 없습니다. / 친구는 지금도 방사능의 공포와 싸우고 있습니다. / 그렇지만 이제 포기하고 있습니다. / 아직 16살인데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서서히 죽음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 만약 살아난다고 해도 앞으로는 방사능의 공포와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 정치가도 국가도 매스컴도 전문가도 원전의 상층부도 모두가 적입니다. 거짓말쟁이입니다. / 텔레비전에서는 원전에 대한 것이 방송되지 않고 있습니다. / 똑같은 쓰나미 영상이나 매스컴의 매정한 인터뷰, 입에 발린 말뿐인 애도의 말, 피해를 “천벌”이라고 했던 정치가. / 정치가는 급료라도 저축이라도 털어서 도와 주세요. / 명령만 해대지 말고, 안전한 장소에서 보지만 말고, 현지에서 몸으로 도와 주세요. / 우리들은… 버려졌습니다. 틀림없이 후쿠시마는 격리될 것입니다. / 안전에 의해 버려졌습니다. 나라에 의해 버려졌습니다. / 우리들, 피해지의 인간은 앞으로 계속해서 피해자를 버렸던 나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원망할 것입니다. / 이것을 봐 주신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 언제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릴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옆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 그리고 그 사람을 지금보다 더욱 소중하게 생각해 주세요. 지금 청춘시절을 보내는 학교가 시체 안치소가 되고 있습니다. 체육이나 클럽 활동을 했던 체육관에는 이미 다시는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이 누워 있습니다. / 어떻게 하면 진실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 한 사람이라도 봐 주시면 행복하겠습니다. / 생각 끝에 제멋대로입니다만 이 공간을 빌렸습니다. / 미안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신원미상의「진실」

이것이 창작된 것인지 아닌지는 나에게는 어찌되든 좋았다. 왜냐면 이 글에 휩쓸리는 감정의 강도에는 거짓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읽자 잊을 수 없었다. 혼란된 속에서 보이는 냉정함과 강렬한 부정성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앞서 내가 쓴 글에 일말의 부정정신이 깃들어 있었다면, 이 편지에 가득한 “원한”의 정동에 자극받았던 탓이리라.

– 번역: 신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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