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김종배란 역사가가 정체성을 묻더라

- 오항녕

광화문에서 버스를 탔으니까 얘기를 듣기 시작한 건 훨씬 전부터인 듯한데, 자꾸 숭실대에서 넘어오는 고갯길, 봉천고개길이 기억난다. 맘에 드는 친구와 모처럼 만나 음악회를 갔다가 한 잔 하려고 피차 본거지가 가까운 관악구청 근처로 자리를 옮기던 중이었다. 어디쯤에서 그 얘기가 나왔는지, 왜 그 얘기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잊히지 않을 것이 분명한 이름 석 자, 김종배. 친구의 말을 옮겨보자.

대략 83학번 정도. 나중에 확인해보니 맞는 듯하다. 63년생이니까. 성균관대 역사교육과. 어느 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시대가 끝나고 민주노총이 조직되던 무렵, 당시 활동을 하고 있던 친구에게 김종배는 제안했다고 한다. 전노협 활동 기록을 정리해야겠는데, 같이 하자고. 원래 별로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친구는 덜컥 그러겠다고 했단다. 김종배는, 지금 우리가 이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단다. 어디서 그런 깊은 안목을 얻었을까?

역사교육과를 다녔다지만, 당시 행적으로 미루어 교실보다는 데모나 노동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듯하니 학과의 영향은 적은 듯하다. 또 당시 개인이든 단체, 조직이든, 그 역사를 담은 기록을 모으고 관리한다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을 때이다. 몇몇 개인들이 보여주는 선각자 스타일의 기록수집이 있었고, 김종배의 구상이 있던 1995년 몇 해 뒤인 1999년에 ‘공공기록관리법’이 생기기는 했지만, 역시 일각의 일이었다. 역사학계는 일부 민중사관, 사회경제사관을 통해 역사현실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길러주기는 했지만, 기록을 남기는 것도 역사학의 본분이라는 데까지는 아직 눈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전노협은 이제 해산하는 단체가 아닌가? 아무리 피와 땀으로 빚은 조직이라도 떠날 때 돌아보고 마무리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특히 거기서 끝나는 조직이라면 그래도 손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민주노총이라는 새로운 조직이 구성되는 시점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그곳으로 옮겨가는 게 보통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이유에서 김종배는 내게 이상한 존재로 다가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정체성이 역사학자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갖고 있지 않았던 나에게, 내 정체성을 물어보게 만들었다. 데면데면하게 얘기를 풀어놓는 친구는 몰랐겠지만, 나는 그때 매우 놀랐다. 흔들렸다. 그리고 이 놀라움과 흔들림이 앞으로 계속 될 것이고, 그냥 가라앉지 않을 체험이리라 예감했다.

아무튼 그렇게 2년, 김종배가 기획, 지휘하고, 친구도 힘을 보탠 전노협 백서가 1997년에 완성되었다. 주로 1990년부터 1995년까지 6년간의 기록이었지만, 전노협 창립까지도 1권의 자료를 보탰다. 김종배의 역할은 ‘전노협 백서발간위원회’에서 발간팀장이었다. 백서를 만들 때는 1차 사료가 있게 마련이다. 당연히 1차 사료를 정리해서 분류하고, 백서에 들어갈 목차를 짜서 집필에 들어갔을 것이다. 실제로 전노협 백서 홈페이지(http://wbook.liso.net/)에 가면 그간의 진행 상황은 물론, 백서도 인터넷으로 볼 수 있다.

백서가 발간되고 난 뒤, 백서를 만드는 데 사용한 1차 사료에 대한 보관 대책도 세웠을 것이다. 그 방법은 민주노총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단병호 위원장을 비롯하여 민주노총 책임자들은 그 자료와 함께 백서를 민주노총에서 관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친구의 말에 따르면 백서를 만든 원사료, 1차 사료는 사라졌다고 한다. 몇 평이면 보관할 수 있는 자료였을 것이다. 그리고 김종배의 지휘에 따라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더 손을 댈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백서가 주지 못하는 질감과 관점을 줄 수 있는 자료로 누군가를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기록은 없다. 내가 민주노총에 확인한 바,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 기록에 대한 책임 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노동자역사 한내’로 간 것도 있지 않을까? 제발 그러길 빈다.

‘한내’는 ‘전노협 백서발간위원회’가 모태가 되어 생긴 노동자역사자료실이다. ‘노동자 역사 한내’, 물론 홈페이지로 먼저 확인할 수 있다. http://www.hannae.org. 친구에게 물었다. ‘한내’가 뭐냐고. 잘 모른단다. 그래서 내가 심통을 부렸다. 좀 알아듣게 이름을 지으라고. 큰 냇물, 뭐 이런 뜻이 아닐까 싶다.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1999년 8월 27일 강원도에 강의를 다녀오다가 자동차 전복 사고로 세상을 떴다. 친구 말로는 말도 안 되는 무리한 일정이 원인이었단다. 거의 전국을 대상으로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하다가 과로로 인한 사고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말이다. 강원도 진부 출신이었던 그가 강원도에서 생애를 마감한 것이 위안이 될까. 묘역은 마석 모란공원.

이런 백서를 옛 사람들은 실록이라고 했다. 나라는 망해도 역사는 망하는 법이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곳곳에 그 실록을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은 그중 우리에게 알려진 대표적인 기록이다. 왕조시대에, 그러니까, 왕조 ‘이후’를 말하는 모든 곳에 반역의 딱지가 붙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왕조 이후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였고, 실록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실록은 ‘후대 사람들’, 그러니까 ‘조선 이씨 왕조가 망한 뒤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남기는 것이라고 말했으니까. 그런 점에서 문명의 깊이를 더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 하는 일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전노협백서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그런 데 해당된다.

어딘가에서 그 ‘조선왕조실록’의 영역(英譯)을 추진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어느 나라 역사기록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실록을 통해 외국인들은 한국이 얼마나 유구한 문화민족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자연재해 등 기상 기록은 글로벌한 자료이기 때문에 외국 학자들도 충분히 흥미를 가질 것입니다. 실록 영역은 또 대중문화에서 시작된 한류(韓流)를 인문학 차원에서 업그레이드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인터뷰 기사다. 실록의 영역에는 해외의 한국학 연구자와 그 제자들을 대거 참여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실록을 영역해야 유구한 문화민족임을 알게 될지, 외국 학자들이 관심을 안 가지면 좋은 사료가 아닌지, 영역을 하면 한류가 인문학 차원에서 업그레이드가 되는지는 내가 잘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만 얘기하자.

우선, 내가 보기엔 영역할 사람이 없다. 실록은, 20년 걸려 번역한 책 수가 413책이다.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제대로 번역할 수 있는 학자 몇 되지 않는다. 두 해 전, UCLA에서 내 논문을 포함해서 6편을 묶어 책으로 내는 데도 녹록치 않았다. 이런 일을 할 때는 순서가 있다. 역사 용어에 대한 글로서리가 먼저이다. 지금 글로서리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컬럼비아대에서 나온 《한국문명 자료집 Source book of Korean Civilization》(P. H. Lee edit.)이 가장 나은 편이고, 국내에서는 그나마도 없다. 그래서 영문 초록이라도 달라치면 사람마다 제멋대로이다. 수만 종에 이를 역사용어에 대한 정리부터 해야 한다.

둘째,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조선왕조실록 재번역에 착수했다. 번역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의 언어사용이 달라져서 30년마다 재번역을 하지 않으면 번역서의 활용가치가 없다고 한다. 최근 학계는 물론 일반 독자들도 실록을 접할 기회가 많은데, 재번역으로 중론이 모아졌다. 만일 실록 영역을 하더라도 이 재번역본으로 시작해야 한다.

셋째, 실록에 대한 세간의 오해가 있는데, 실록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연대기 식의 문서모음이다. 이것을 영역한다는 것은 마치 청와대에서 생산되는 문서를 주제 불문하고 모두 영역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정말 이건 내가 심사가 못돼먹어서 그러리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실록 영역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를 스친 것은, “이건 도대체 무슨 콤플렉스일까?”라는 의문이었다. 배려와 공유가 학문의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호 필요에 의한 배려와 공유여야 한다. 중국에서 그 많은 한적(漢籍)을 번역해주지 않아도 연구할 학자들은 다 연구하고, 영화 만들 사람들은 다 영화 만든다. 필요한 사람들이 필요한 언어로 번역해서 쓰는 것이다. 중국에서 언제 명실록(明實錄), 청실록(淸實錄)을 영역한다는 말을 하던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될 때는 안 하는 것이다.

실록 영역 얘기는 국사편찬위원회 신임 위원장의 작년 10월 인터뷰에서 나왔고, 요즘 정부 예산 수립에 맞추어 추진 중이라고 한다. 유명한 분이고 내가 배운 분이기도 하니, 뭔가 심모원려(深謀遠慮)에서 하신 말씀이리라 믿고 있지만, 앞의 김종배란 분의 실천과 자꾸 겹쳐지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국사편찬위원회니까, 조선왕조실록을 영역하는 웅대한 꿈도 좋지만, 이 시대에 ‘조선왕조실록’에 해당하는 기록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도 보람되지 않을까? 그래도 명색이 ‘국사(國史)’인데 적어도 조선왕조실록 수준의 내용을 채우려면, 전노협백서, 아니 전노협백서에 미처 담기지 않은 채 남겨져 있는 자료를 정리하고 소개하는 데까지 손길이 미쳐야 되지 않을까? 이참에 국사편찬위원회와 노동자역사한내가 MOU라도 체결하면 어떨까? 그러면 국사가 훨씬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국격(國格)은 이렇게 높이는 것이라고 믿는다.

응답 5개

  1. 김종익말하길

    김종배, 그에 대한 글을 이곳에서 읽다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글을 읽으며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움일까, 안타까움일까, 아니면 그를 역사학으로 이끌어 ‘운동’의 세계에 발을 딛게 만든 일종의 회한일까, 아니면 민간인 사찰의 피해 당사자가 되어 시대의 야만을 몸소 겪어내는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하여튼 반갑고, 고맙고, 감사합니다.

    전노협백서는 노동자역사한내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한내’는 백기완 선생님께서 직접 써 주신 것이고요. 그의 죽엄을 안타까워하던 이들이 모여 한내를 만들었고, 열심히 노동 운동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투쟁백서, 해고는 살인이다 등을 발간하였고, 홍대청소노동자 투쟁 백서도 만들고 있습니다.

    늦은 밤, 메일을 열었다가 뜻밖의 글을 읽고 두서없는 댓글을 적었습니다. 양해하시길. 김종익 드림

    • cuda말하길

      아….형님. 셋째 형님. 종배형 셋째 형님글을 여기서 보다니요.
      당혹감이지 뭔지 모를 감정이 복받쳐와 눈물을 멈출수가 없습니다. 이젠 종배형 때문에 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셋째 형님때문에 또 울게됩니다.
      전 종배형 후배입니다. 백서팀2기 였어요.
      종배형 10주년때 셋째형님 추도사 하시는거 멀리서 바라본게 마지막이었네요. pd 수첩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노동운동 그만두고 종배형도 못찾아보고 있어요.
      종배형은 ‘괜찮아 괜찮아’하는데…
      형님. 셋째 형님. 건강하세요. 꼭 건강하세요…

    • 여하말하길

      형님이셨군요. 제가 공부하는 데 화두가 될 듯하여, 기억하자는 뜻에서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제가 제대로 된 역사학자라면 곧 뵐 날이 있겠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2. 고추장말하길

    선생님 칼럼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전노협백서와 국사편찬위원회…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는데… 그나저나 뒤를 돌아보는 일이, 미래로 달려가는 일과 같음을 알기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건강하시지요?

    • 여하말하길

      아무리 생각해도 시원찮은 글재주인데, 박정수 선생이 몇 회 더 연장을 강제한 탓에 접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업보가 될 듯한데 … 그래도 그 덕에 고추장님 몇 마디라도 들으니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절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게 말입니다. 학생/친구들과 방학세미나도 하고. 아, 다음주부턴 하워드 진, 미국민중사를 읽습니다. 뿌듯하게 지내다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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