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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워크 in 쿠니타치(たまウォークinくにたち)>개최와 그 후

- 야마구치 유키(山口侑紀) (히토츠바시 대학원)

번역: 신지영

1. 나의 입장.

지진이 일어났을 때, 나는 도쿄에 있었다. 일년 간의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 보고서를 대학에 제출한 다음날의 일이다. 2005년에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상경할 때까지, 나는 후쿠시마현 후쿠시마시에 살고 있었다. 지금도 부모님은 후쿠시마 시내에 거주하고 있다. 지진 직후에는 안부도 알 수 없었고, 연락이 된 뒤에도 식량과 가솔린이 심각하게 부족하다고 들어서, 가족이 매우 걱정되었다. 나중에 작은 할아버지(大叔父)와 선배가 쓰나미에 휩쓸려 갔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할아버지는 미야기 현(宮城県) 와타리 읍(亘理町)에서 차에 타고 있던 중 쓰나미의 피해를 입었다. 시체는 2개월이 지나 겨우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장례식에 갔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체가 너무도 많아 언제 화장할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경찰관이었던 중학교 시절 선배는 후쿠시마 현 후타바마 읍(双葉町)에 있는 후쿠시마 제2 원전에서 일하고 있었다. 제 2 원전 주변이 피난지역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한달 이상 경과한 뒤부터 행방불명자 수색이 진행되었다. 경찰관 5명의 시체를 찾았으나 선배는 여전히 남아있는 최후의 행방불명자이다.
 
봄방학이었기 때문에, 나는 일주일 정도 집에 틀어박혀 텔레비전만 계속해서 보고 있을 뿐이었다. 14일, 텔레비전에는 원전의 폭발영상이 방영되고 있었지만, 아나운서는 그것을 “폭발적 현상”이라고 부르면서, “안전하다 안전하다”라고 반복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멜트 다운(meltdown)은 일어나고 있었고. 한자어 “福島(후쿠시마)”는 가타카나 “フクシマ(후쿠시마)”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방사능 문제가 물러지기까지 더구나 원전에서 60킬로 떨어진 현청 소재지인 후쿠시마시의 오염이 심각하다고 판명될 때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경찰관인 탓에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탓에, 여태껏 “정치적 활동”을 일절 하지 못했던 나도,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월 말 시부야 데모에 참가했다. 그렇지만 이 집회가 “반원전”이라는 말로 테마를 정리해 버렸던 것에는 어쩐지 위화감을 느꼈다.

2. <타마워크 in 쿠니타치>가 이뤄지기까지

by R.I의 사진1

5월14일, 밥을 먹으러 어떤 가게에 가자, 20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리 중에 있던 선생님이 부르셔서 옆에 가서 앉았다. 그들은 주로 쿠니타치에 사는 시민들로, 재난으로부터 3개월째가 되는 6월 11일에 뭔가 운동을 벌일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젊은 여성도 있다면 중년 남성도 있었고, 이미 50년간 반원전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노인도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참여자 중에는 타마 지역의 시민 의원이나 뮤지션이 많았다.) 어떤 젊은 여성은 이렇게 발언했다. “나는 여태까지 데모에 참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뭔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데모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 아직 일본에서는 데모라는 말에 대해서 좋지 않은 이미지를 지닌 사람들이 많다. 그녀의 의견에 찬성한 사람이 많아서 “타마 워크”라는 명칭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전부터 운동을 해 왔던 50대 정도의 남성은 “데모라는 명칭을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라며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그런 예상 외의 상황도 있었지만, 그 공간은 회의라기 보다는 각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의 불안이나 생각을 나누는 장소와 같았다. 나처럼 후쿠시마의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면, 도쿄에서 아이들을 기르고 있는 이상 방사능 오염의 영향을 걱정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건강이 걱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 “워크”는 어떤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는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모이는 완만한 집단으로 하자는 인식이 만들어져 갔다. 굳이 종합적인 이미지를 말해본다면, 그것은 쿠니타치시(国立市)와 고쿠분지시(国分寺市)를 연결하는 타마란자카(多摩蘭坂)에 살고 있었던 이미 고인이 된 뮤지션 이마와노 키로시요(忌野清志郎)1 와 같은 것이리라. 이마와노의 팬이 몇 명 있기도 했고, 원전에 대해 노래했던 “섬머 타임 블루스(サマータイムブルース)를 함께 부르기로 되었다.

 “어떤 주장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모일 수 있다”는 이 컨셉은, 나중에 다음과 같은 선전문이 되었다.

후쿠시마 사고에 분노하고 있는 사람,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 슬퍼하고 있는 사람,
후쿠시마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 자신의 소중한 사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
속았다고 느끼는 사람, 막연한 불안을 품고 있는 사람,
의견대립이 무서운 사람, 토론할 기회가 없는 사람,
“끙끙거림”이 쌓여가고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걸으면서 호소한다, 느낌을 표현한다. 생각한다.
아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모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중얼거리고, 메일을 보낸다.
원전에 대해서,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해서,
느낌이나 사고가 얼어버리지 않도록,
논의나 의견표면이 가능한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어찌하나 원전! 타마워크”.

3. 정치적인가 아닌가?

by R.I의 사진2

이 <타마워크>가 정치적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쿠니타치시는 시내 여기저기에 게시판이 있고, 그곳에 종교나 정치 등을 제외한 이벤트를 게시할 수 있다. 시청은 이번 <워크>는 이른바 “반원전”을 명시적으로 내세우고 있지 않게 때문에 정치적이지 아니라고 판단했고, 우리는 <타마워크>를 자유롭게 게시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한편 대학의 반응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교직원들이 “우리들도 대학인으로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여, <이야기하자 재난과 원전 사고 teach in @ 히토츠바시(語り合おう 震災と原発事故 ティーチイン@一橋大学)>을 기획했다. 기획한 직후인 6월 상순, 대학에서 개최된 문화제에 맞춰, 교문 앞 공공도로에서 <타마워크 in 쿠니타치(たまウォークinくにたち)>의 삐라를 돌리고 있자, 대학의 사무직원이 “정치적인 행동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결국 삐라를 돌리는 장소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삐라를 나눠주고 있었던 것은 주로 크라운 아미(CLOWN ARMY, 삐에로 모습을 하고 데모의 충돌 등을 막거나, 일반인에게도 공격적이지 않게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그룹)였다. 학생으로부터는 “반원전이라고 할거면 전기 쓰지 마”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삐라를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대학 안에서의 홍보로는 <타마워크>보다 <티치인>을 내걸기로 했다. 그렇지만, 학교 식당에 학생들이 돌리고 있던 삐라가 사무직원에게 회수당하거나, “티치인은 교육 활동이 아니라 정치활동이지 않은가”라면서 <티치인>을 위해 교실을 빌려준 것을 취소할 듯한 상황이 되거나 하는 등, 반발이 심했다. 섹트(당파)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타마워크>의 컨셉에서 “끙끙거리는 고양이(もやもや猫)”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입간판과 삐라 등에 사용했다.

by S.M의 사진

4. 그날의 모습과 이후 예정에 대해서

그날 아침, 비가 흩날렸다. <타마워크> 실행위원 내부에서 예전부터 이야기해 왔듯이 150명 모이면 잘 모이는 것이겠는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합 시간인 2시가 가까워옴에 따라 사람수가 점점 늘어나더니, 결국 700명이 참여했다. 여성 참여자가 약 60%, 아이를 데려온 사람이나 장애자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출발 전에 레게 가수인 리쿠루 마이(リクルマイ)씨의 소리에 맞춰서 전원이 키로시로(清志郎)의 노래를 불렀다. 그 후 시작된 <타마워크(ウォーク)>에서는 구호(Sprechcho)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이 가까이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천천히 쿠니타치의 거리를 걸으면서 행진했다. <타마워크(たまウォーク)>의 컨셉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쿠니타치시는 도심에서 전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장소에 있는 고급주택지이다. 어떤 친구들은 이러한 완만한 행진은 정말 쿠니타치답다고 했다. 이 모습은 youtube등에서 볼 수 있다(http://youtu.be/hAJhGnI6tvk).

 한편 티치인에는 300명이 모였다. 그렇지만, 실행위원인 학생을 제외하면 학생 출석자는 거의 없었다. 대학인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고, 대부분이 일반론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시민들이 후반에 했던 발언에 비해 신선미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 피해지 출신 학생이 말했던 “원전사고만이 311이 아니다”라는 발언은, 일정한 관심을 받았다. 또한 그때까지 명확하지 않았던 학교 안 방사선량의 개인 측정 결과가 발표됨에 따라, 학내 토론이 시작되었다.

 <제2회의 타마워크(第二回たまウォーク)>는 이미 기획단계에 돌입해 있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포함한 재해대책회의가 실시되고 있다. <티치인> 쪽에서는 쿠니타치 시내 교육시설의 방사선량을 측정하도록 호소하는 시민의 탄원이 회의를 통과하여, 이후 순차적으로 측정이 실시되고 있다.

<타마워크 in 쿠니타치(たまウォークinくにたち)>나 <티치인 @히토츠바시(ティーチイン@一橋大学)>를 통해서, 상황이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던 것은 확실할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과제도 많다. 특히 대학의 과제가 부각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학생의 관심을 어떻게 끌 것인가’, ‘정치적이라고 두려워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등은 시급히 논의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번 611액션, <타마워크> 컨셉에서 배운 것은 311 원전사고가 후쿠시마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쿄에서도 건강에 대한 불안이 있다. 예를 들어 어린이가 없는 세대에게도 “끙끙거림”은 공통된 현상이다. 어떤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의 주장을 하는 것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중층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타마워크>가 취했던 어프로치는 이후에도 큰 힌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고 링크 (일본어)
타마워크 in쿠니타치(たまウォークinくにたち) 공식 블로그http://d.hatena.ne.jp/tamawalk2011/

1. 이마와노 키요시로(忌野清志郎, 본명은 쿠리하라 키요시栗原清志, 1951.4.2~2009.5.2): 일본의 락 뮤지션. 싱어 송 라이터, 기타리스트, 작사가, 작곡자, 음악 프로듀서, 배우, 에세이스트, 화가. 일본 록의 혁명가로 불린다. RC 섹션의 보컬로 데뷔했고, <忌野清志郎 & 2・3'S>, <忌野清志郎 Little Screaming Revue>, <라피타피(ラフィータフィー)등의 밴드를 이끌면서 소울 블루스를 기본으로 한 록 사운드를 전개했다. 1982년 2월에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콜라보레이션 싱글 《이케나이 루즈매직》을 발매하기도 했다. 1990년 밴드가 해산하고 1991년부터 솔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나 2006년 후두암 진단을 받고 2009년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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