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 _ 2013년3월16일

- 벌레벌레배급사

아래의 기록은 2013년 3월 16일 카페별꼴에서 열린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 상영회 관객과의 대화입니다. 산야의 전/현직 활동가들이 자리해, 뜻 깊은 시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아베씨와 하시, 요코, 나카타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참고 :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의 첫 상영회 기록 http://suyunomo.jinbo.net/?p=9851
「만국의 romusha여, 복수하라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1985)」 http://suyunomo.jinbo.net/?p=9856

아베 : 안녕하세요. 저는 아베라고 합니다. 도쿄에서 왔고요, 이 영화와 관련해서 소개를 덧붙이자면, 저는 80년대부터 산야에서 지원 활동을 해왔습니다. 직접적으로 <산야, 당하면 복수하라>의 상영 위원회와는 관련이 없지만, 사토 미츠오씨와 산야에서 함께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사토 미츠오씨가 찍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으로는 야마오카 쿄이치씨가 완성을 했죠. 야마오카씨와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짧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산야의 쟁의단은 81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83년부터 야쿠자가 우익 단체를 자처하면서 산야 쟁의단을 습격했었구요. 이 와중에 사토씨가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야쿠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다음 야마오카씨가 영화를 완성을 시켰지만, 다시 야쿠자가 그를 죽였죠.
영화를 보시면서 아마 이 장면에서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지막 부분의 큐슈 치쿠호 지방 이야기 말이죠. 이 장면에서야말로 야마오카씨가 요세바 운동을 어떻게 사상적으로 생각해왔는지가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하층노동의 지배형태 자체가 큐슈의 탄광노동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거죠. 일본 근대 탄광노동은 노동자를 어디에선가 납치해 와서 마치 타코베야(*문어를 잡는 항아리 모양의 덫) 마냥 가둬놓고 폭력적으로 노동을 강제했던 거죠. 그런 노동형태는 일본의 탄광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야쿠자 조직도, 물론 야쿠자라는 것은 에도 시대에도 있었지만, 일본 근대 탄광 노동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야마오카씨가 야쿠자의 산야 지배를 해석하기 위해서, 영화 안에서 탄광노동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죠. 탄광 노동을 지탱하는 커다란 부분은 바로 일본이 전쟁을 하던 와중에, 강제로 타이완 사람이나 조선 사람을 징용했었다는 점입니다. 야마오카씨는 산야라는 것을 이렇게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야마오카씨의 이론적인 배경으로는 후나모토 슈지라는 일본 활동가를 들 수 있습니다. 산야와 가마가사키에서 운동을 했던 사람이고, 마지막에는 오키나와에서 자살을 하셨던 분이죠. 후나모토 슈지야말로 타이완 사람이나 조선 사람의 존재야말로 인력시장을 설명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해석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70년대 초반, 일본에서 운동이 무너진 상황 속에서 운동을 해왔고, 1975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에 천황의 아들이 오키나와에 방문하는 것에 항의해 분신을 하셨죠. 오키나와의 반대자, 그러니까 지금은 천황이 되어 있는 그가 오키나와에 오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분신을 택했던 거였는데… 어쨌거나 이러한 활동가의 영향을 받은 야마오카씨에게는 조선인의 하층노동 문제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 야마오카씨의 이론적 배경으로는, 큐슈 지쿠호 지방의 탄광 노동 운동과 거기에서 나온 사상을 들 수 있습니다. 다니가와 간, 모리사키 카즈에, 우에노 에이신 등이 참여했던 탄광 운동이요. 그것이 야마오카씨가 생각했던 운동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죠. 그 중에 한 명은 이 영화에도 협력을 했었어요. 그리고 영화 안에서, 전쟁 패배 후 대만인들이 도깨비 시장 같은 것을 했었다는 장면에서도 그러한 영향을 느낄 수 있죠. 대만인 임세덕씨의 인터뷰 씬도 그렇구요.
그러니까 영화에서는 인력시장 이야기 다음에 갑자기 큐슈의 지쿠호 지방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것은 산야가 야쿠자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더 크게는 아시아를 관통하는 민중 해방을 위해서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야마오카씨의 믿음으로부터 비롯된 겁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로무샤’라는 단어도 아시아에서 정말로 보편적인 일반명사가 되어버린 그 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고요.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야마오카씨는 결코 산야의 운동을 훌륭하고 좋은 것으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희극적으로 그 운동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야마오카씨는 산야쟁의단의 운동에 대한 비판도 이 영화에 담았습니다. 먼저 이 정도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질의응답:

구로 : 저는 벌레벌레배급사의 구로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야쿠자를 불러다 놓고 산야쟁의단이 다그치는 부분이었어요. 보통 한국에서 노조협상을 하면 노조의 대표자들이 회사로 가지, 노동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 회사 사람이 한 둘 와서 그렇게 협상하진 않거든요. 그게 일본 노동운동 안에서 흔한 방식이었는지, 산야에서만 있었던 특이한 방식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베 : 그 사람은 아마도 야쿠자가 아니고 ‘함바’의 사람일 겁니다. 어쨌든 그 장면은 아마도 산야에서만 있었던 독특한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산야쟁의단의 역사에서 보면, 1970년대에 산야해방위원회, 산야현장투쟁위원회 등 새로운 운동의 패턴이 나타났죠. 그들이 노가다를 하는 당사자들에게 직접행동을 하자고 주장했던 거예요. 직접 가서 말하자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그렇게 된 거죠. 그러한 산야나 가마가사키 등 인력시장의 운동은 일본 노동운동 전체에서 보면 아주 드물게 나타난 현상, 흐름이었어요. 완전히 다른 것이었죠.

승인 : 저는 작년에 두물머리 투쟁 중 농사지었던 사람이고요, 직업은 자전거 만드는 일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인민 패트롤’을 하는 장면이 나오죠. 보온병에 차나 죽을 가지고 다니면서 길에서 자는 노숙자들을 깨우는 거죠. 얼어 죽지 말라고. 근데 그게 산야에서 어떤 위원회가 생겨서 조직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한 건지, 그렇지 않으면 몇몇이 독자적으로 한 행동인지가 궁금했어요.

아베 : 영화에 나오는 인민패트롤은 물론 산야쟁의단이 만든 것이었는데요, 덧붙여서 설명하자면 그 당시 80년대에는 노숙자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다른 문제로 싸웠었죠. 노숙자의 문제도 물론 컸지만, 90년대에 들어서 일본 버블경제가 붕괴한 후에 인력시장에서의 운동은 노가다 운동보다 노숙자 운동이 더 커졌던 것이죠. 인민 패트롤은 산야 뿐만 아니라 노숙자 운동에서 기본적인 것이지만, 90년대 이후 더 중요하게 된 겁니다.
90년대 이후는 다른 지역에서도 인민패트롤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밤에 돌아다니며 노숙자를 구하는 일인데, 밥을 배급하거나 젊은 애들이 노숙자들을 습격하지 않도록, 공무원들이 쫓아내려고 오지는 않는지, 뭐 그런 것들을 체크하는 것이죠. 노숙자를 이렇게 서포트하는 것은 90년대 이후 인력시장 운동에서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찍었을 당시에는, 이렇게 인민패트롤 같은 게 활동의 중심이 될지는 몰랐었어요. 영화 안에서 예를 들어 서서 마시는 싸구려 술집에서 노동자들이 일 끝내고 술 마시는 장면이 나오죠. 그런 술집 자체를 이제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어요. 그건 지역 자체가 그러한 보기 좋지 않은 분위기를 배제했기 때문인데… 지금 보면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생활보호를 받으면서 사는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생활보호를 받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도록 하는 것이 운동의 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가 선구적인 것은, 단체로 노가다들이 생활보호금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죠. 이 장면 또한 야마오카씨가 만든 것입니다.

젤리 : 저는 이 카페에 종종 놀러오는 젤리라고 합니다. 보통 노조라는 것은 단일한 사업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공동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인데, 산야쟁의단은 같은 사업장이 아니라 각기 다른 사업장에서 각각 다른 일일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조직이잖아요? 그 각각의 다른 노동자들이 쟁의단이라는 단일 노조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 의도적으로 조직이 된 것인지(활동가들에 의해),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지게 된 것인지, 쟁의단이 형성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하나의 단일한 노가다 노조 운동이라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대단하게 느껴져서요.
아베 : 아주 중요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야마오카씨가 생각하기에는 그가 만든 건 사실 산야 ‘쟁의단’이죠. 조합이 아니예요. 조합이라는 이름을 일부러 쓰지 않았어요. 그것은 노동조합이라는 것이 산야의 노동형태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노동자들 스스로 만들어낸 조직은 아니고, 활동가들이 만든 것이죠. 그렇지만 그들은 결코 노동조합을 만든 적이 없어요. 야마오카씨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로 싸울 수 있는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노조가 아니라 쟁의단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큐슈를 모델로 했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거기에서는 다니가와 간이라는 사람이 타이쇼 탄광에서 타이쇼행동대라는 조직을 만들었었어요. 그는 60년대 후반 전공투 운동의 선구자적 존재이기도 했는데, 행동위원회라고 해서 활동하고 싶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의 전투성을 자발적으로 나타낼 수 있도록 그렇게 조직을 만들었어요. 그것이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일단은 그런 것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야마오카씨의 이론적 배경이 된 쿠마모토 슈지라는 사람은 산야의 노동자들을 유동적 하층노동자라고 불렀어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 장소 등을 생각할 때, 노동조합이라는 방식은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산야 운동에서도 노동조합을 만들고 싶어했던 사람이 있었고, 논쟁이 있었어요.

대홍 : 저도 이런 모임이 있을 때 한번씩 오는 사람이고요, 이름은 대홍입니다. 요즘 산야는 어떤가요?
아베 :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90년부터는 인력시장의 운동의 중심이 노숙자 운동이, 그러니까 노동운동에서 노숙자 운동이 중심이 되었다고 말씀 드렸는데요, 그럴 경우 정부 쪽에 의존해버리는 형태의 운동이 되기 쉽죠. 어떠한 정책을 정부에 요구하는 운동이 때로는 노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배제의 방식의 정책이 나오게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지금 산야 운동에서 가장 큰 이슈는 노숙에 대한 강제배제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요즘 도쿄에서는 다테가와라는 노숙인 집단 주거지를 철거하는 것에 저항하는 운동이 있습니다. 다테가와는 산야 가까이에 있는, 집단적인 노숙인 꼬뮨이 있는 곳이죠. 이곳에서 노숙인들의 텐트를 강제 철거 하는 것에 대한 반대하고 있어요. 또 시부야에 나이키 공원이라는 것이 있었죠. 나이키가 공원에 대한 권리를 돈으로 사서, 나이키 공원을 만들기 위해 거기에 살던 모든 노숙자들을 강제 추방 했었죠. 요즘의 산야는 그런 운동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그러한 현장에서는 활동가가 대상(노숙자)에게 뭘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가 주체성을 어떻게 가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활동가가 위에서 좋은 방법을 지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료 급식을 나눠줄 때에도, 우리는 식사를 노숙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만들고 먹습니다. 공동취사라는 것을 하고 있는 거죠. 산야 뿐만이 아니라 시부야 등 여러 곳에서 공동취사를 합니다. 다른 조직에서는 활동가들이 만들어서 주기만 하는 방식의 배식을 하기도 하지만요.

사회: 그렇다면 이제는 자유롭게(^^) 관객들의 이야기를 좀 들어볼까요? 어떤 활동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일동: 우왕좌왕. 쟤들은 푸시라이엇 운동을…
사회: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하시나요?
&& : 저는 뭐 하는 게 없고, **이 주로…
** : 보통 서울 도심에서 신고를 하지 않고, 게릴라적으로 퍼포먼스를 하고, 그걸 영상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려서 전 세계적으로 퍼트리죠. 가장 최근에 한 행동은 서울의 박정희 기념관 앞에서, 프시 라이엇이 러시아 대성당에서 난동을 피운 것처럼 퍼포먼스를 했던 거예요. 박근혜가 당선되기 전에 기념관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다행히 잡히지 않고 무사히 나왔어요.
사회 : 이따가 같이 동영상을 감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유튜브가 좋긴 좋네요.

승인 : 그 전에 잠깐 아베씨에게 질문 하나 더 할게요. 젊을 때 일본 운동사라는 영상을 잠깐 테이프로 본 적이 있었어요. 대나무 긴 거에다가 머리에 하얀 마스크 쓰고 멀리 떨어져서… 전공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뭐. 그 이후에 벌어진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제가 이래봬도 아버님이 1900년 생이세요. 아버님이 저를 53세에 낳으셨고 뭐 저도 나이가 좀 있죠. 아버님한테 들은 얘기가 있어서 영화를 보면서 좀 친근하게 느껴졌었어요. 아버님이 일본에 징용을 갔다 오셨거든요.
아베 : 어디에 계셨었나요?
승인 : 지역은 잘 모르겠지만, 일본 해안가 쪽 어딘가에서 철로 건설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오셔서도 철로 쪽 일을 하셨었어요. 흙을 단카(들 것)에 옮겨서 지었다고 들었어요.
아베 : 야마오카씨는 홋카이도 출신이세요. 저도 홋카이도이지만(^^), 야마오카씨는 특히 유바리라는 탄광이 있던 지역의 사람이예요. 그러한 배경은 확실히 있었어요.
승인 : 좋은 데서 오셨네요. 거기 눈이 참 많이 쌓이잖아요..
아베 : 여기보다 추워요. (^^)

(*이후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가 ‘단카’라든지 ‘함바’라는 일본말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습니다.)

사회 : 함바가 정확히 뭐죠? 공사장에 있는 식당을 말하는 게 아닌가요?
승인, 구로 : 일용직 노동자들이 숙식을 다 해결하는 집이란 뜻이죠.
아베 : .함바라는 게 공사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사는 집인데, 사실은 감금된 형태이죠.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집, 그러니까 오막살이 같은 것이예요. 원래 산야라든지 요세바에서는 하루하루 일터를 바꾸는 사람도 있긴 있지만, 함바에 가서 몇 십 명이 같이 몇 달 간 일을 했다가 끝나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그런 식이 많았죠. 그런데 90년대 이후는 노숙자들이 정말 많아졌고, 그래서 건축회사 쪽에서는 더 싸고 나쁜 조건으로 노동자를 데려갔죠. 함바에다 밥값을 내게 해서 오히려 번 돈보다 더 쓰는 경우도 있었죠.
@@ : 서대문에 가면 한미인력이라는 데가 있는데요, 아마 서울에서 제일 큰 업체 중 하나일텐데, 하루에 300-400명이 일을 하러 나가는데, 지방으로 사람들을 많이 보내요. 버스가 서너대 있어요. 지역마다 태워서 보내는데, 주로 농사 쪽으로 많이들 나가고, 건설 쪽으로도 많이 나가요. 영월에 비슷한 인력회사가 있는데, 이주노동자들을 3미터 6미터 컨테이너에 3~4명씩 숙식을 제공하고 그날그날 돈을 주는 게 아니고 달랄 때마다 조금씩 주더라구요. 이주노동자들은 일도 그렇고 단속도 피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 같더라고요. 인력회사 사장들이 지역 유지다보니까 지역 경찰들도 손을 놓고 있더라고요. 지방에 갔다가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봤어요.

멍구 : 저도 그냥 여기 사람들 친군데요,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요, 멍구예요. 가끔 집회 같은데 나가는 게 취미고요.(^^) 영화에서 야쿠자 악질 조직이 하나 나오고, 그 조직이 산야 쪽 노동자들한테 심하게 하니까 산야 쟁의단이 투쟁하는 과정이 설명되는데요. 거기보면 구로가 말한 것처럼, 인력시장 수배사 사람들을 앉혀놓고 단체협약 같은 걸 체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어쨌든 다 야쿠자 두목들인 것 같던데, 그 중에 감독을 살해한 악질 조직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후에 수배단과 야쿠자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영화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아베 : 물론 야쿠자와의 분쟁은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에 더 심해졌습니다. 우리 쪽에서 체포 당한 사람도 백 명을 넘었습니다. 아직 우리 운동 쪽에서 종합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한데요, 우리는 야마오카라는 지도자를 잃었고, 사실 그는 대중운동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죠. 그의 죽음 이후 그것에 복수하기 위해 우리 운동 쪽이 군사화되었던 측면도 있었어요. 산야 안에서 영토 분쟁 등을 하기도 했고, 정말 매일 싸웠어요. 야쿠자의 자금원은 도박이나 수입인지를 가짜로 만들어서 파는 것 등이었는데요, 그걸 막기 위해, 인력시장은 아침이 가장 중요하니까 아침에 대립을 많이 했었어요. 야쿠자 배후의 조직이 전국 동원을 해서 아주 무서웠던 때도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영화가 만들어진 86년이라는게 나카소네라는 자민당 총재가 신자유주의적인 것을 처음 시작했기도 했고 국가주의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던 시기였죠. 그런 상황 속에서의 좌우 대결의 초점 중 하나가 산야였어요. 산야의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그 영화 상영회가 전국에서 열리면서 그런 배경에서 주목을 받았죠. 그 다음 90년대에 운동은 좀 줄어들었지만, 노숙자 지원운동으로 투쟁의 흐름이 바뀌었고요.

아저씨 : 한가지만 더요. 영화 속에 병원이 나오는데요, 병원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일인당 얼마씩 지원금을 받는가요? 겉모습은 멋있어 보였는데, 거기 들어갔다 온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힘든 곳이었던 것 같아요. 지원금을 받아서 운영했는지, 그 사람들을 데리고 인체 실험이라고 한 것은 아닌지 궁금해요.
아베 : 인체실험이라기보다는 로보토미 수술(전두엽 절제술) 등을 했었어요. 영화에 나오는 병원은 정신장애가 있던 사람들도 수용했던 곳이죠. 그 우쯔노미야라는 병원에 대한 투쟁은 요즘까지도 계속 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영화에 이 장면이 나온 이유는, 하층노동자들이 인력시장과 형무소, 정신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온 것이죠. 지금은 정신병원을 그렇게 쓰지는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 억압을 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승인 : 잘 들었고요. 영화 속에 도박이 나오는데, 제가 듣기로는 일본 조총련 계열에서 슬롯 머신(파칭코) 계열의 60-70퍼센트를 차지한다는데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요.
아베 :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아요. 일본의 파칭코는 사실 재일조선인이 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건 나쁘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식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화에서 도박 문제가 나온 것은 도박 자체가 야쿠자의 자금원이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죠.

하시 : 산야에서 온 하시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의 아주 나중에 산야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영화에서처럼 야쿠자와 싸우는 게 아니라, 노숙자 지원을 중심으로 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경기가 나빠지면서 산야라는 동네 자체가 일용직 노동자 동네라기 보다는 그냥 노숙자 동네가 되고 있어요.
아베 : 아까 멍구가 질문했던 거 대답하자면, 영화에서 싸웠던 야쿠자는 요새 7~8년 쯤에 일본 최대 야쿠자인 야마구치파 아래로 들어갔어요. 지금은 도저히 싸울 수 없게 되어버렸죠.
아저씨 : 노숙자 운동을 하고 있는 하시씨에게, 정부의 지원을 받는지 조직 안에서 자금을 받는지 궁금해요.
하시 : 정부의 지원을 일체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모금해서 유지하고 있어요.
젤리 : 저는 한국의 생활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어서, 일본과 교류도 하고 있는데 <그린 코프>라고 후쿠오카 지역 중심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노숙자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노숙인 자립생활 지원 센터 운동을 하더라고요. 그게 일본에서 주요한 사회문제여서, 생협 쪽에서도 그런 사업을 한다고 이해했었는데, 단순히 그런 게 아니라 운동적인 역사성을 가지고 하고 있다고 들어서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했었어요. 일본의 사회문제 중에 노숙인 문제가 한국보다 훨씬 주요하게 다뤄진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본의 경우에는, 사회 운동의 흐름 안에서 노숙자 운동을 많이 하는지 아니면 그냥 불쌍하니까 적선한다는 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궁금합니다.
하시 : 일본 노숙자 운동 속에서도 그런 정부나 행정조직이 돈을 받으면서 할 것인가, 아니면 받지 않으면서 자립해서 할 것인가가 대립점으로 있었죠. 산야에서도 비슷하게 노숙자에게 일을 제공해서 거기에서 사업체 같은 걸 만들어서 돈을 마련하자는 그룹도 있었어요. 운동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은 정말 노숙자에게 작고 적은 일이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운동체로 긍정할 수 있을 것인가가 논쟁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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