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8호] 편집자의 말 – 사랑하려거든 독사처럼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사랑하려거든 독사처럼

 

지난 주 김예슬씨가 아주 상징적인(!) 대학인 고려대학교 경영대에서 ‘자발적 퇴교’를 선언했습니다. 그걸 본 순간, 스스로 ‘부스러기’를 자처하며 ‘덩어리’와의 싸움을 준비하던 70년대의 ‘전태일’이 떠올랐답니다. 물론 전태일은 조금 달랐죠. 분노와 슬픔, 어쩌면 희망까지를 끼얹어 그는 제 몸에 불을 놓았어요. 하지만 김예슬은 그런 것들을 발끝에 담아 적에게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렸다고나 할까요. 아무런 애원이나 호소, 청원이 담겨 있지 않은, 말 그대로 행동의 선언이었죠. 자신의 적을 가감 없이 지목하고 “누가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고 말하는 그 ‘독기’가 저로서는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지난 5호에서 우리는 ‘배움의 공동체’이기를 포기한 대학, 그리고 장사꾼들에게 빼앗긴 대학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외국의 학생과 교수들 이야기를 다루었는데요. 한국에서도 과연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 걸까요?

이번호 주제는 ‘루쉰’입니다. 루쉰 읽어보셨어요? 루쉰은 ‘코뮤넷 수유너머’ 사람들이 가장 애독하는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저마다 맘속에 비수처럼 꽂힌 문장들을 갖고 있지요. 누군가는 그걸 빼지 못한 채로 앓고 있고, 누군가는 그걸 자기 무기인양 쥐고 다닙니다. 이번호 <위클리 수유너머>를 기획하며, 수유너머의 젊은 학인들에게 그 문장들을 내보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중국문학에서 루쉰이 차지하는 위상이라든가, 루쉰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함의 같은 걸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가슴 속으로 달려드는 루쉰의 문장들을 나누어보자고 했습니다. 제한된 시간이라 많은 분들이 참여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계속 보내주세요. 틈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editor@suyunomo.jinbo.net)

저도 여기서 맘 속 문장 하나를 꺼내고 싶은데요. <화개집(華蓋集)>(1925)에 실린 어떤 사랑법에 관한 이야깁니다. “밥, 이성, 나라, 민족, 인류… 무엇을 사랑하든 독사처럼 칭칭 감겨들고, 원귀처럼 매달리고, 낮과 밤 쉼 없이 매달리는 자라야 희망이 있다. 지쳤을 때는 잠시 쉬어도 좋다. 그러나 쉰 다음에는 또다시 계속해야 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라도 계속해야 한다. 혈서, 규약, 청원, 강의, 눈물, 전보, 집회, 추도사, 강연, 신경쇠약, 이런 것은 모두 소용없다.”

밥이든, 이성이든, 나라든, 민족이든, 인류든, 사랑한다면 독사처럼 칭칭 감고 원귀처럼 매달려라! 사정할 것도 없고, 호소할 것도 없고, 심지어 혈서를 쓸 것도 없다! 아니 아플 필요도 없다! 그냥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악착같이 도전하고 ‘살아내야’ 한다, 독사처럼, 원귀처럼! 아마도 삶에 대한 그런 사랑만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 같습니다. 상황을 정면으로 볼 용기가 없어 자기기만적으로 품는 희망, 그 희망이 역전되어 세상과 자신을 욕하면서 품게 되는 절망, 병이 깊어지자 그래도 조금은 덜 아팠던 옛날을 흠모하는 향수, 이 모든 게 그야말로 욕설만도 못한 질병들입니다.

“신음하고 탄식하고 통곡하고 애걸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놀랄 것이 없다. 그러나 무서운 침묵을 보면 조심해야 한다. 독사처럼 시체의 숲 사이를 기어 다니고 원귀처럼 어둠 속을 달리는 것을 보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진짜 분노’가 도래할 조짐이다.” 독사처럼, 원귀처럼! 참 무섭고도 멋진 사랑 아닙니까? 꼭 보여주고 싶어요. 김예슬씨가 말한 우리 ‘적들에게’ 말이지요.^^

이번호에 중문학 연구자인 최정옥 선생이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루쉰의 글들을 소개해주었어요. 루쉰 읽기를 결심하셨다면 좋은 길잡이가 될 겁니다. 아울러 이광수와 루쉰을 비교한 권용선 선생의 글, 그리고 일본의 루쉰 연구 권위자인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 읽기를 소개한 윤여일 선생의 글도 좋은 참고가 될 겁니다.

참 여러분이 <위클리 수유너머>를 매 번 보면서 보지 못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바로 정기화, 김현식, 서동욱인데요. 정기화 선생은 글보다 더 사랑받는 <위클리 수유너머>의 커버 디자인을 해주시는 분이고, 김현식, 서동욱씨는 <위클리 수유너머>의 웹 운영과 기술지원을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개하니 왠지 보컬이 밴드 멤버 소개하는 것 같네요.^^ 그런데 혹시 우리 밴드도 팬레터 같은 걸 받을 수 있을까요? ㅋㅋㅋ

고병권(수유너머R)

응답 10개

  1. 한서말하길

    -고기맛을 모르다와 물맛을 모르다-

    소악을 듣는 것도 하나의 세계이며, 음료수가 없는 것도 또 하나의 세계이다.
    고기를 먹어도 맛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이며, 음료수 때문에 격투를 벌이는 것 또한 하나의 세계이다.

    물론 그 사이에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셈이지만,
    그러나 “소인이 없으면 군자를 기를 자가 없다”하였으니 소인들이 멋대로 격투를 벌이고 목마름으로 하여 목숨을 함부로 하는 것은 괘씸한 일이다. 듣건데, 아라비아에는 물이 귀중품이어서 피와 교환하지 않으면 음료수를 구할 수 없는 곳이 있다 한다. ‘우리 민족성’은 평화애호심이 왕성하니 설마 그렇게 까지는 도지 않겠지. 그러나 여요현의 시례는 상당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족한 바가 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기를 먹는 사람이 그 연주를 들어서 고기맛을 모르게 되는 “소악”외에도 물맛을 모르게 된 인간이 그 연주를 듣고 물을 마시고 싶어지는 “소악”도 필요한 것이다.

    중국의 ‘공자제’라는 행사날 신문에 두가지 기사가 났었습니다. 고관대작들의 연회에서 옛날 공자가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석달 동안 고기맛을 모르다” 라고 감탄한 소악을 들을수 있었다. 라고 그리고 가뭄이 오래된 여요시에서 음료수때문에 주민들간에 싸우다 곤봉과 돌로 맞아 죽었다는…..윗 글은 이 두 기사를 보고 쓴 글입니다. 후반에 갈수로 루쉰의 풍자체가 세련되어 거의 예술성을 더해 간다는 ^^

  2. 한서말하길

    -고기맛을 모르다와 물맛을 모르다-

    소악을 듣는 것도 하나의 세계이며, 음료수가 없는 것도 또 하나의 세계이다.
    고기를 먹어도 맛을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이며, 음료수 때문에 격투를 벌이는 것 또
    한 하나의 세계이다.

    물론 그 사이에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라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셈이지만,
    그러나 “소인이 없으면 군자를 기를 자가 없다”하였으니 소인들이 멋대로 격투를 벌이고 목마름으
    로 하여 목숨을 함부로 하는 것은 괘씸한 일이다.
    듣건데, 아라비아에는 물이 귀중품이어서 피와 교환하지 않으면 음료수를 구할 수 없는 곳이 있다
    한다. ‘우리 민족성’은 평화애호심이 왕성하니 설마 그렇게 까지는 도지 않겠지. 그러나 여요현의 시
    례는 상당히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족한 바가 있다.

    따라서 우리들에게는 기를 먹는 사람이 그 연주를 들어서 고기맛을 모르게 되는 “소악”외에도 물맛을 모르게 된 인간이 그 연주를 듣고 물을 마시고 싶어지는 “소악”도 필요한 것이다.

    중국의 ‘공자제’라는 행사날 신문에 두가지 기사가 났었습니다. 고관대작들의 연회에서 옛날 공자가 연주하는 것을 듣고는 “석달 동안 고기맛을 모르다” 라고 감탄한 소악을 들을수 있었다. 라고

    그리고 가뭄이 오래된 여요시에서 음료수때문에 주민들간에 싸우다 곤봉과 돌로 맞아 죽었다는…… 윗 글은 이 두 기사를 보고 쓴 글입니다. 후반에 갈수로 루쉰의 풍자체가 세련되어 거의 예술성을 더해 간다는 ^^

  3. 연초록말하길

    일요일 오전 끙끙거리면서 도덕의 계보학 서문을 요약하고-요약했다기 보다는 모르는 말에

    대한 의문을 잔뜩 늘어놓고 첫 시간에 소개받은 위클리 수유에 들어왔습니다.

    읽을 글이 너무 많아서 매일 들어와서 조금씩 읽어야 할 것 같네요.

    정독도서관에서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 저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도 잘 모르면서

    수유공간너머와 인연을 맺었고 아마 이 인연은 상당히 오래 끈질기게 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듭니다.

    너무 움추러들지 말고 너무 많이 기대하지도 말고,그저 일상속에 스며들어서

    제 삶의 전체적인 지도를 조금씩 바꿀 수 있길 기대하고 있지요.

    그것이 눈에 확 들어나는 변화가 아니라해도 그럴 마음을 먹었다는 것,그리고 한 발

    내딛었다는 것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고

    스스로를 격려하고 있습니다.그래도 되겠지요?

    • 쿠카라차말하길

      선생님과의 인연이 저희들의 삶에도 변화의 파장을 일으킬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4. 여하말하길

    김예슬 씨의 대자보가 붙은 뒤, 학생들은 웅성거리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게 뭘지 궁금해집니다. 마침 1학년 새내기들에게 내준 무형식, 무제한의 레포트, ‘내가 꿈꾸는 대학생활’에 이번 사건을 포함시켜 써보라고 했습니다. 받아보고 또 얘기를 해봐야지요. 그나저나 김예슬씨를 수유너머 구로로 스카웃할까 생각 중.

  5. 고추장말하길

    오~ 이상엽 샘 오랫만이네요. 위클리가 수유너머의 인연들을 다 끌어모으는 듯 하네요^^ 네, 한 번 보면 좋겠어요. 4월 쯤 한 번 모여볼까요? ㅋㅋ 우리부부가 3월엔 쫌 바빠서~

  6. 이상엽말하길

    미디어의 진화를 보는 듯 하네요. 잘 있죠? 병권씨 내외랑 윤태호 함께 해서 한번 봐야하는데… 나도 프레시안과 함께 ‘이미지프레시안’이라는 포토저널리즘사이트를 만들어요. 곧 오픈 할 겁니다. http://www.imagepressian.com/ 나중에 함 봅시당.

    • 고추장말하길

      대단한 사이트네요^^ 방금 ‘유민의 도시’를 봤는데… 눈물이 울컥…

    • 쿠카라차말하길

      와, 이미지 프레시안 정말 멋지네요. 새로운 인터넷 매체가 될 거 같아요. 즐겨찾기에 놓고 자주 보겠습니다.

  7. 비포선셋말하길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 사랑은 그렇게 쉽지 않아라. 술마시고 싶을 때 한 번쯤은 목숨을 내걸고 마셔보아라~ 문득 떠오른 노랫자락을 흥얼흥얼 거려봅니다.. ㅋ 누가 더 (사랑이) 독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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