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열 살 어린 여자 친구가 있다. 지금 내 나이가 스물여덟이니까, 그녀는 열여덟, 즉 아직 ‘민증’도 나오지 않은 새파란 십대와 사귀고 있는 것이다. 천하의 도둑놈이이라고 지탄하는 자들도 있었고, 삼대가 복 받을 일이라고 부러워하는 자들도 있었다. 평상시 소심한 내 성격을 잘 알던 오래된 친구들은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며 경악을 금지 못했다. 그 친구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은 한결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
나의 첫 연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불분명하지만)은 장애여성이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지만 정서적으로 많은 교감을 나누었고 서로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보통 나의 연애사에 대한 술자리 잡담에서 그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반면 그만큼이나 짧았던 찰나의 관계들도, 상대가 비장애인이라면 쉽게 이야기를 꺼낸다. 그렇다고 내가 장애를 가진 나의 연인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뛰어넘는 숭고하고 지고지순한 사랑 따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일반적으로 ‘연인사이’라고 할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감정과 행복감을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느낄 수 있었다...
동성애자들이 슬픈 이유는 그들의 사랑이 세상의 인정을 받기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주고받을 인구군이 협소해서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슬픈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들에게도 사랑의 욕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은 이성으로부터는 물론 동성으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한다. 연애가 불가능한, 소수자 중의 소수자, 속칭 ‘찐따(들)’말이다...
처음 빈집을 찾아갔을 때, 나는 그곳이 연애를 위한 최적의 인큐베이터라고 생각했다. 당시 1인당 하루 숙박 2천원인데다가, 커플이 가면 화장실이 따로 연결된 제일 좋은 방을 내어주었으니까. 예닐곱 명이서 같이 밥을 차려멱는 집이니, 저녁 때쯤 놀러가서 숟가락 한 두 개 얹어 같이 식사를 하고, 술자리도 같이 하다보니 어색함이 금세 사라졌다. 무엇보다 내 경제적 사정이나 애인의 미래 비전, 둘 간의 결혼 계획 등을 묻지 않는 그들이 좋았다. 그럼, 오늘 밤, 여기서 묵어도 될까?...
좋아하는 언니가 있었다. 그녀는 남자들이 대다수인 커뮤니티에서도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면서 ‘잘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대학 새내기였던 나에겐 대단하게만 느껴졌었다. 서로 ‘자기’라고 호칭하는 여자친구와 손을 꼭 잡고 걸어다니면서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뿜어내기도 했고, 찌질하거나 무지한 동기들에게 호통도 잘 쳤고, 어르기도 잘 했다. ...
김조광수는 제작자 겸 감독이다.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정치색이 강한 16mm 단편영화를 만들다가 1999년 기획과 홍보를 맡으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청년필름을 설립해 등 7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2007년 커밍아웃 이후에는 등 퀴어 영화감독으로도 직접 나섰다. 그 밖에 각종 동성애 운동을 주도해온 인권활동가이다...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도 사람이 살만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며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던 건축기사 형님이 있다. 건축의 가능성을 믿듯이 연애의 가능성을 믿는 형님이다. 물론 연애는 젬병이다. 시도 때도 없이 밤샘작업에 지방출장, 건설현장에서 그을린 시커먼 피부, 전라도 사투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돈도 없고 직장도 변변찮다. 그러나 성격 하나는 끝내주게 낙천적이던 형님은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이 다니던 교회로 눈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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