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수(致水)는 고대 사회로부터 공동체의 생사존망을 가르는 매우 중요한 지도자의 책무 중의 하나였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거나 가뭄이 드는 등의 자연적 현상 또한 이러한 지도자의 덕에 따라 달리 변할 수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그만큼, 백성들이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를 좌우하는 ‘물’을 다스리는 일이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의 능력을 가늠하는 매우 기본적인 것이다. ...
글의 졸박함이란 무엇일까? 본디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혹은 그 대상과 사건에서 이야기해야 하는 바를 가장 적절하고 절실하게 표현하는 것이지 않을까. 말하자면 글에 있어서의 골기(骨氣)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함에만 머문다면, 뼈대를 이루고 그것을 살아 생동하게 하는 요소들이 지나쳐서, 그 본래의 졸박함 대신 화려한 미사여구로 살만 찌는 것이다. ...
글은 졸함으로써 나아가며 도는 졸함으로써 이루어지나니, 하나의 ‘졸(拙)’자에 무한한 의미가 있다. 도원에서 개가 짖고, 상전에서 닭이 운다 함은 그 얼마나 순박한가! 차가운 못에 달이 비치고, 고목에서 까마귀 운다 함은 공교롭기는 하나 그 가운데 문득 쓸쓸한 기상이 있음을 느낀다. 몇 년 전 화서각의 첫 수업발표회를 준비하던 때의 일이다. ...
‘부동심(不動心)’에 관해 돌에 새긴 이야기를 마감해야 하는 날부터 그만 며칠 앓아눕고 말았다. 물 한모금도 마실 수 없고 말도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나날은 정말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화장실 정도는 오갈 수 있었지만, 계획된 일정 모두를 아이들의 입을 통해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병이 아니란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고통스런 시간을 잘 견디기만 하면 ...
한가로운 것은 겨를이 생겨 여유가 있는 것이다. ‘겨를’은 어떤 일을 하다가 생각 따위를 다른 데로 돌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겨를’은 어찌하다 우연히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사용 의미와는 달리 한가함은 남는 시간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러한 수동적 의미에서조차도 우리에게는 그러한 시간은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
보통 우리는 하루의 얼마만큼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쓰고 있을까? 이 시간은 가장 가치 있고, ‘유일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위한 사적(私的)인 활동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하는 것이다. 니체는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쓰지 못하는 자는 노예라고 구분 짓고 있다. 노예적 상태의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아무리 많은 자본을 독점하고 있더라도 예외일 수는 없다. ...
대마다, 처한 위치에 따라 사람과 모든 사물이 타고난 바를 해석하는 척도가 달랐다. 특히 고대인의 척도에서 보는 마땅히 해야 할 바는 기독교적인, 혹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고대 희랍인(그리스인)들에 있어서의 선악(善惡)에 대한 판별을 그 중의 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들에게 선에는 선, 악에는 악으로 갚을 힘을 갖고 있고, 실제로 복수할 수도 있으며 ...
어떤 일이 실재하는 것으로 그것은 정당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따라 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합법성이 부여된다. 또 다르게는 어떤 생각 혹은 판단하는 바가 즐거움을 주면, 그것은 참된 생각이며 그 결과 또한 훌륭하다고 여긴다. 이에 근거하여 그 생각 자체도 또한 훌륭하고 참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렇듯 효용적인 면에서 즐겁거나 좋은 것이라는 ...
삶의 절실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스승의 가르침이나 친구의 조언을 통해 그 해답을 구하고자 한다. 또는 평소 애독하는 책을 다시 펼쳐 먼 옛날의 친구에게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실패에 직면한 어떤 이들은 이 모든 행위들의 무용함을 주장하기도 한다. 책을 많이 읽어도, 강의를 많이 들어도 자신의 삶에는 변화가 없다고. 그러나 글과 말을 탓하기 보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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