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보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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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보면 사회운동은 각 개인이 저마다의 삶에서 마주하고 있는 문제가 통로를 만들어 낸 순간, 그 순간에 바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세계에 의해, 국가에 의해, 사회에 의해 규정되고 있지만 또한 각자의 사연에 의해 굴절되고 있기도 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거슬러 올라 따져본다면 ‘빈틈없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의, 내 가족의 생애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아버지가 정신이상으로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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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이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어느 모로나 명백하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2년 전부터 ‘세계 개조’의 논의가 본격화된 그 직후까지, 민족 독립의 호기를 맞았다고 생각하고 선언이나 시위를 계획한 것은 한두 사람이나 두어 단체에 그치지 않았다. 천도교 일각에서는 이미 1916년부터 독립운동 논의가 있었으며, 서울과 평양의 기독교 일파에서도 독립선언을 준비하고 있었고, 1918년 말
  • 독하게 마음먹었다 흐지부지하고, 엉겁결에 말려들었다 싶었는데 인생이 달라지고― 사건과의 만남은 예측불허다. 3․1 운동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7천이 넘는 사망자와 4만이 넘는 검거자 대부분은 준비 없이 이 사건과 마주친 경우였을 것이다. 10년 동안 쌓아온 불만, 평생을 눌러 온 울울한 사연이 있었겠지만 1919년 3월 1일이 닥치기 전 이 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귀띔 받은 사람은 드물었다. 서울 시내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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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대 법대에 다니고 있던 양주흡이 고향인 함경북도 북청을 향해 떠난 것은 1919년 1월 31일이다. 도쿄 유학생 사이 2․8 독립선언 계획에 참여한 후 자못 흥분돼 있는 상태였다. 조선 유학생들 사이 공개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월 6일이었던 듯하다. 이 날 학우회 편집부 주최 웅변대회에 참석했던 양주흡은 “구세의 국책을 설명하여 만장일치가 되었으므로” 위원 열 명을 뽑아 일본에 대해 시위운동을 벌이
  • 극작가 김우진은 남성으로선 드물게 생애가 온통 스캔들화해 버린 경우다. 여성이야, 그것도 근대 초기의 신여성이야 소문과 스캔들 속에 갇혀 살았지만, 남성으로서 김우진만큼 풍문 속에 소진돼 버린 경우는 달리 찾기 어렵다. 1926년 8월 일본서 조선을 향해 오던 여객선에서 실종됨으로써 김우진은 지금껏 한 세기 동안 ‘정사’의 주인공으로 남았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사의 찬미」의 가수 윤심덕의 애인이라는 틀
  • 이태준의 『화관』을 기억하는가. 양귀자의 『잘 가라 밤이여』—후일 『희망』이라는, 확실히 덜 어울리는 제목으로 바뀐―를 읽어본 적이 있을까. 그렇다면 김장두며 형의 선배도 기억할지 모르겠다. 『화관』에서 김장두는 난발에 구질한 의복으로 횡설수설 여주인공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잘 가라 밤이여』에서 형이 떠메고 온 선배는 앙상해진 몸으로 나성여관 방 한 칸에서 발작에 시달린다. 김장두는 본래 명
  • 한참 게으름을 부리는 사이 인터넷에 권애라 관련 글이 늘었다. 박진영 선생이 광익서관을 추적하다 권애라에까지 시선이 가 닿았나 보다(http://bookgram.pe.kr). 더 보탤 말이 없다 싶지만 두 토막으로 나눠 쓰려고 준비한 몫이 있어 췌사를 무릅쓰기로 한다. 스캔들화돼 버린 권애라의 젊은 시절을 엮다가 남편 명색으로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멈추고 말았는데, 글을 잇다 보면 결국 남성의 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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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애라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개성 난봉가’ 소동일 것이다. 1920년 가을 여자고학생상조회 주최의 강연회에서였다고 한다. 이 무렵 권애라는 이미 여성 연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몇 달 전 종교교회 여자야학강습소에서 개최한 연설회에서 여성교육의 필요를 대호(大呼), 거액의 의연금을 모아 근화여학교(오늘날 덕성여자대학의 전신) 설립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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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운동은 아직도 일종의 불가해한 운동이니 만큼 그 구체적 양상은 드러나지 않은 바 많다. ‘민족’의 ‘독립’이라는 이념 아래 전 조선인이 궐기, 사망자만도 7천여 명에 달하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1919년 봄철 내내 저항 운동을 벌였다는 것이 공식 서사의 요체이지만, 지도자도 조직도 태무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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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장안면장 김현묵은 3·1 운동 당시 34세였다. 장안면 토박이였고, 1910~11년에 경무학교를 다닌 후 졸업해 순사가 되었다. 1년 동안 순사 노릇을 한 후에는 다시 측량학교에서 반 년 간 공부한 후 인접한 우정면에서 겨냥도[見取圖] 그리는 일을 했다. 토지조사사업의 일환이었으리라. 1915년에는 장안면사무소 서기로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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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장안면이라면 3·1 운동 당시 공세적인 시위를 벌인 것으로 이름 높은 고장이다. 4월 1일 밤 장안면 및 이웃한 여러 면 산 위에서 봉화가 솟은 데 이어, 3일에는 장안면과 우정면에서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보통 지방에서의 시위가 장날 군중이 모인 와중에 몇몇이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작되었다면, 장안·우정면에서의 시위 양상은 한결 조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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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장수 김두원이라 하면 지금 삼십세 가량만 된 사람이면 누구든지 알 만한 유명한 소금장수이다.” 1920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가 서두를 연 솜씨로 보면, 당시로선 김두원이 거의 대중적인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해방 후에도 소문이 끊이진 않았고 근래 재발견되기도 해서, 고은의 『만인보』에도 「소금장수 김두원」편이 있고 희곡도 진작 한 편 나와 있다는 정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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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봄, 5·16 쿠데타 이후 설치된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을 통해 또 한 명이 처형당했다. 성명 한필국, 나이 37세, 혐의는 밀수였다. 한필국은 평안도 태생이다. 상업학교를 졸업, 분단 후에는 국영백화점 점원으로 일했고 1·4 후퇴로 UN군이 후퇴할 당시 함께 월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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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초등학교 시절 신동우 화백의 『만화 한국사』쯤을 봤던 게 아닌가 싶다. 송진우가 고문실에서 사나운 개와 마주하고도 꿋꿋하던 장면이며 유관순이 판사에게 냅다 의자를 던지던 장면이며, 아직도 눈에 선한 ‘민족주의의 영웅’들의 초상과 더불어 조선인 형사의 애국이 기억나곤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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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마 각종의 조직사건도 함께 기억할 것이다. 통혁당, 민청학련, 인혁당, 남민전, 더하자면 조작의 흔적이 한결 역력한 유학생간첩단이며 문인간첩단에 이르기까지. 이들 조직은 대부분 실제 활동은 미약했던 가운데 왜곡되고 부풀려지고 고문과 중형으로 혹독하게 다루어졌으며, 대중과 접촉하기 전에 국가권력에 의해 적발되고 감금되고 압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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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월 5일은 3월 1일 못지않게 중요한 날이다. 3월 1일의 독립선언 및 군중시위에 이어, 사건의 귀추와 총독부의 대응을 가른 것은 5일의 학생시위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