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19일, 두 명의 헌법재판관이 새로이 취임하며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퇴임 87일만에 5기 헌법재판소 구성이 완료됐다. 기존 법도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버리는 결정들을 내리는 곳이 헌재다. 그 구성원들의 면면에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고, 언론은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들의 대부분은 주로 주요 현안에 대한 견해였는데, 그 중 제일 주목할 만한 것은 사형제에 대한 견해였다.
안경 쓴 남자가 죽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분명 자신의 방에 들어올 남자가 위협적일 것을 예감하고 미리 몸수색까지 감행하였다. 또한 귓속말을 요청받았을 때도 그는 경호원으로 하여금 재차 그가 “깨끗하다”는 것을 확인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예방에도 불구하고 죽게 되었다. 결
지난 5월 17일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광주시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건강 현황을 발표한 바 있다. 직접적인 상해자나 고문 피해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인데 무려 43%가 “5-18을 생각하면 분노, 슬픔, 죄의식 등 매우 강한 정서를 느낀다”고 답했다. 5월만 되면 불안하고 답답하며 우울해지는 소위 ‘5월 증후군’이다. 그런데 따져보니 내가 그렇다.
오늘날 상대적이고 제거적이고 환원적인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지. 그러나 만약에 우주 만물의 진화나 인류 역사의 발달이나 생물 개체의 성숙에 방향과 목적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그게 무얼까. 아마 생물 개체가 성숙하는 방향이나 목적은 항상성 유지를 넘어서 스스로가 가진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여 더 만족하게 사는 것,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겠니.
가령 제가 이진경 선생님을 향하여 “진경아!”라고 불렀을 때 돌아올 파장을 생각해봅시다. 아마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황당함에 웃거나, 선생님께서 오늘따라 마음에 여유가 없으시다면 웃어넘기지 못하고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냐?”라는 반응이 올 수도 있겠지요. 반말이라서 기분이 나쁜 걸까요?
우리의 일생을 과연 누구에게 바치는가, 라는 노랫말을 가진 가요가 있다. 1996년 나온 이 노래는 “‘정복’ 당해버린 지구에서 쓰러져 가버리는 우리의 마음”을 말한다. 가사는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그에게 팔과 다리와 심장을 잡힌 채” 있고 우리가 많은 걸 ‘잃었다’고 표현한다. 이렇게 “넋이 나간” 영혼들은 자본의 노예로 살아간다. 우리의 심장을 잡고 있는 ‘그’는 누구이며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일까? 특히, 이 노래가 나온 지 17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는 누구일까?
2013년의 5.18이 벌써 보름 정도가 지난 시기인데도 5.18과 관련하여 논란이 계속됩니다. 당시 광주의 시민군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종합편성채널의 방송으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한 유머 웹 싸이트인 ‘일간 베스트 저장소’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들 나름의 놀이문화가 종합편성채널의 방송과 맞물려 사람들을 자극하였고
민주주의는 대체로 지지와 옹호의 대상이었다. 신념에 의거해서 민주주의를 당당하게 비난하고 혐오한 소수의 사람들[1]을 제외한다면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한 예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보통선거제도의 실시 이후 민주주의는 표를 구하는 엘리트 정치집단들이 가장 선호하는 단어가 되었고, (정치체제와 지배자의 성격이 그토록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들은 자신
‘아니, 이건 무슨 언어 파괴?’ 라는 생각을 하며 누가 이런 문자를 보냈나 싶어 프로필 사진을 봤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10여 년 만이었다. 아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내게 연락한 것이었다. 사회적 인간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대충 잘 산다고 대답하며 상대의
니체의 말마따나 인간은 무(無)라도 의지한다. 인간은 무언가에 의지해야지만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고 지속시킬 수 있다. ‘시대’나 ‘역사’, ‘세계’와 같은 별이 사라진 시대에서도 인간은 무언가에 의지하고, 의지하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타자와 싸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거대서사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이 의지하는 대상은 바로 ‘나’와 ‘주사위로서의 동전’ 그리고 ‘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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