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픈옹달(수유너머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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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던 봄날의 오후, 흐르는 강물에 발을 담그고 걸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강바닥에선 금빛모래가루가 흩날렸다. 강물 안에는 송사리들이 이리저리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산의 푸르름이 와 닿아 비친 연초록 빛의 강의 표면은 복잡했다. 깊이 숨을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옷이 물에 흠뻑 젖은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강 옆을 지나다녔고, 한 임신부는 남편의 손을 잡고 ...
  • 그동안 파괴와 살육에 시달리는 강의 비명소리를 진즉부터 듣고 있었음에도 선뜻 현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지 못했던 건 사소한 일상을 핑계로 한 '귀차니즘'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따라서 휴일 아침의 이른 새벽, 단잠을 포기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돌아가고픈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강을 향하며 '강이 더 망가지기 전에..'라는 문구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
  • 누군가 거대한 탑에서 돌멩이 하나를 빼낸다. 탑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너무 나대는 것 같아요.” 1학년 남학생반 수업시간이었다. 국어시간에 대안교육 잡지 에 실린 김예슬 선언을 읽어주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묻는 질문에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 그 아이의 표정은 장난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복잡해 보였다. 내가 받은 인상은 그랬다. ...
  • 애플의 아이폰에서는 사용자의 동의를 얻어 그의 위치정보를 활용하는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구동시킬 수 있다. 간단한 길찾기 기능은 물론이고, 자기 반경 5km(최대 100km) 안에서 트위터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위치를 찾아주기도 한다. 또 ‘증강현실’ 어플이라고 불리는 몇몇 어플들은 주변의 역, 버스 정류장, 약국, 편의점 등 온갖 편의시설의 위치를 띄워주기도 한다. 끔찍하게도! ...
  • 지난 2008년, 검찰은 주경복 전 서울시교육감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수사하면서, 수사 대상자 100여 명의 최장 7년치 전자우편을 통째로 압수해 열어보았다고 한다. 편지라는 극히 사적인 대화 조차도 한번 기록된 이상, 절대적인 보호를 보장받을 수 없다. 아예 전자우편 기록 자체가 없었다면 압수수색 영장인들 의미가 없었을 것을. 오늘날 정보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기록된다. ...
  • 는 좀비영화의 대부 조지 로메로의 (1973) 리메이크작이다. 바이러스로 마을 사람들이 미쳐서 서로 죽인다는 설정만 보면 ‘좀비가 나오지 않는 좀비영화’ 쯤 되겠다. 하지만 의 진정한 공포는 ‘미친 사람들’이나 ‘괴(怪)바이러스’에 있지 않다. 살을 뜯어먹는 좀비보다 총을 든 인간이 더 끔찍하진 않으며, 확산양상이나 증상에 일관성이 없는 바이러스는 정체성이 약하다. ...
  • 우리가 알고 있던 종이책, 그 익숙하지만 낡은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 낡은 것은 무너져 가고 있는데, 새것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15세기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구텐베르크의 세계가 창조되었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구텐베르크 이래로 컨텐트는 늘 기술과 만나 스스로를 혁명적으로 갱신해 왔다. 중세의 컨텐트는 근대의 인쇄기술과 만나면서 대중과 혁명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
  • 지난 일요일 오후, 신촌에 모임이 있어 다섯 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들이를 다녀오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충무로 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탔는데, 우연히 두 자리가 비어 있어 얼른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지하철 안은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봄나들이 다녀오는 아이들과 부모들의 이야깃소리 때문이겠거니 하고 앉아 있는데, 유독 눈에 띄는 아이가 있었다. ...
  • 얼마 전, 아버지 꿈을 꾼 적이 있어. 딩동. 벨 소리가 났는데 거실에 앉아 있는 식구들 누구도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어. 딩동, 또 다시 벨 소리가 났어. 마지못해 문 앞으로 다가가 구멍으로 밖을 내다 봤더니, 아버지가 서 있었어. 식구들을 향해 귀신이라도 본 듯 소리쳤지. “아버지가 왔어,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들은 그 누구도 아버지를 맞으러 달려가지 않았어. 서로 끌어안고 벌벌 떨기만 했어. ...
  • 공원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곳에 파란집(Casa Azul)이 있다. 벽도 지붕도 문도 코요아칸의 하늘색을 닮았다. 여기서 프리다 칼로(Frida Kahlo)가 살았다. 그녀는 1907년 7월 6일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생일이 1910년 7월 7일이라고 말한다. 1910년은 멕시코 혁명의 해다. 그녀는 혁명의 딸이었다. 그리고 아스테카의 달력에 따르면 7월 6일은 ‘죽음’(Miquiztli)의 날이지만 ...
  • 한국식 ‘전자발찌법’이라 불리는 개정안이 3월 31일 국회를 통과했다. 전자발찌 부착대상을 살인범으로까지 확대하고, 부착기간을 최장 30년까지 상향조정하며, 형기 종료 후 의무적으로 보호관찰을 받게 하는 것이 주된 개정 내용이다. 이에 대해 이중처벌이다, 재범 예방 효과가 의심스럽다, 프라이버시권을 비롯한 인권침해 요소가 너무 크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
  •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매이가 “아빠, 매이 언니지, 오빠 아니지?” 한다. 처음으로 듣는 ‘젠더’ 발언이라 놀라워서 “응? 무슨 소리야?” 했더니 “응, 매이, 송연이 언니야. 오빠 아니야” 한다. 송연이는 요즘 매이가 엄청 예뻐하는 한 살 아래 여자애다. 매이가 ‘치카치카’(칫솔질)를 안하려 하거나 일찍 안 자려고 할 때 “매이, 이제 애기 아니지, 언니지? 언니는 치카치카도 잘하고 일찍 자야지? ...
  • 식료품을 살 때 겉봉투를 꼼꼼히 보시는 분들이라면 밀가루 표지에 적혀 있는 강력분, 박력분, 중력분, 1등급, 2등급 등의 단어가 적혀있는걸 보셨을 겁니다. 그런 단어를 보는 순간 ‘강력분은 강력한 밀가루란 말인가’, ‘2등급보다는 1등급이 좋겠지?’라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지나 갑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다른 코너로 발을 돌리는 순간, 바로 사라져버리는 질문이지요. ...
  •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녹조현상으로 인해 청계천 관리비용이 매해 30%씩 증가하고 있다. 청계천은 자연하천을 체계적으로 복원한 것이 아닌 수돗물을 펌프로 끌어올려 흘려보내는, 일종의 인공 분수이다. 게다가 개천 바닥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정화작용을 거의 못하기 때문에 물이 썩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

  • 대통령의 고백질과 다짐질

     

    4월 20일, 올해도 어김없이 ‘장애인의 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작년 장애인 시설을 방문했던 대통령은 노래를 부르는 장애인 합창단 앞에서 눈물을 흘렸죠. 그러면서 장애인들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뭉클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잊지 않았는지 올해도 대통령은 특정한 날에만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장애인의 날에만 생색내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훈계를 했습니다. 옆에 있던 영부인도 숭고한 다짐을 했는데요. 장애인이 역경을 …

  • 김융희 선생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99년부터 인연을 맺고 지속적으로 공부해왔다. 연구실 주방에 갖가지 맛난 음식을 남몰래 가져다놓아 ‘우렁각시’로 통한다. 조용히 베풀고 사라지는 손. 그 고마운 손으로 6080의 사는 이야기 을 위클리수유너머에 연재 중이다. 4월 14일 볕 좋은 날, 편집팀은 경기도 연천군 신망리 김융희 선생 댁으로 봄 소풍을 떠났다.
  • 올해 가장 화제를 모은 드라마는 단연 이다. 조선 인조때를 배경으로 노비를 비롯한 천민들의 생활을 그린 사극으로, 명품 근육을 자랑하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TV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세련된 카메라 앵글과 공들인 OST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의 기본 골격은 추노꾼과 노비반란 세력을 통해 본 신분질서의 모순과 소현세자 죽음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등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
  • 오늘날 성은 억압되어 있는가? 아니다. 오히려 부추겨지고 있다. 조 단위의 매출을 자랑하는 육체산업과 연예산업은 ‘성을 즐기라’는 복음을 전파한다. 그러나 성의 즐거움은 고사하고, 성적 존재라는 사실조차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애인들이다. 오랫동안 성적 권리는 이성애자 성인남성의 전유물이었지만, 이후 여성, 동성애자, 노인과 청소년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
  • 고미 타로는 꽤 유명한 그림책 작가다. 그림은 발랄하고 경쾌하고 단순하며, 글은 깔끔하나 정곡을 찌른다. 해서 고미 타로의 책을 읽다 보면 “어?” 하는 사이에 뒤통수를 한 방 맞는 기분이다. 더 희한한 건 맞고 나서도 실실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는 것. 까불대는 막내처럼 보이나, 속에는 참으로 깊고 따듯하고 날카로운 어른 서너 명쯤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 1997년에 첫 발령을 받은 학교는 실업계 고등학교(지금은 전문계 고등학교라고 부른다.)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 이곳에는 구제금융 위기 이후 타격이 무척 컸다. 경제적 타격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2000년에 2학년 여학생반 담임을 맡았다. 한 아이가 자퇴를 하겠다고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돈을 못 버시는 상황이고 동생들이 많다고 했다. 형편이 어려워지니까 부모님이 맏이인 자신에게 학교 그만두고 일해서 집안을 도우라고 하셨단다. ...
  • 나는 어린이집을 ‘학교’라고 부르곤 한다. “매이야 학교가자.” “학교에서 재미있었어?” 장차 매이가 초등학교에 가고 내가 학부모가 되었을 때 생길 문제에 대해 심리적으로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경쟁에서 뒤쳐졌을 때, 선생님에게 문제아로 찍혔을 때,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했을 때, 학교의 교육 방침과 내 생각이 다를 때, 내 생각과 아내의 생각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예행연습을 해보자는 각오였다. ...
  •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한국판 ‘희망의 인문학”이다

    그리고 임영인 신부님은 한국의 얼쇼리스일 것이다

    노숙인과 인문학…어울리지 않는 만남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지만 인문학이란 노숙인,교도소 재소자등의 빈곤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그들에겐 한 끼의 식사와 몸을 누일 따뜻한 방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잠시 그들에게 도움을 줄뿐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의지를 선물하지 못한다

    인문학이 무엇인가 왜 인문학이 필요한가 라는 …

  • 얼마 전에 끝이 난 연속극 를 보셨습니까. 에 ‘업복이’라는 노비가 나옵니다. 노비 업복이는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함께하던 동지들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홀로 총을 들고 임금이 사는 궁궐로 쳐들어갑니다. 그리고 신분으로 차별하는 세상을 향해 총을 쏩니다. 그는 궁궐로 쳐들어가 죽기 전,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 목련꽃 필 무렵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거리에서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으면 봄이 온 거다. 조회 시작할 때 애국가 부르는 것처럼 <하얀 목련>을 부르며 봄을 맞는다. 난분분 낙화하는 양희은의 목소리에 위로받는다. 뭇 생명 약동하는 봄이라지만 언제부턴가 버겁고 부럽다. 나만 그런 건 아닌가보다.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곁눈질 하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으니 …

  • 2010년 ‘평화인문학’ 인권연대와 수유너머, 지행네트워크, 성공회대 등이 함께 진행하는, 재소자와 함께 하는 인문학 프로그램으로 2008년부터 이 이름을 사용했다.이 2월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전자카드를 댈 때마다 철컹거리는 쇠문 소리에 맘까지 철컹거리더니 이젠 교도소 출입이 꽤나 심상해졌다. 딸이 ‘우리 아빠 오늘 감옥 갔어요.’라고 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일이 엊그제 같은데 횟수로는 벌써 3년째다. ...
  • 아파트라는 공간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외로운 공간인 것 같다. 쓰레기를 버리고, 방을 따뜻하게 데우고, 먹고 자고 싸는 것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정말 편리하지만 그것이 오로지 나만의 이로움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기적인 공간이다. 한편 주변에 누가 사는지 전혀 모르고 지내다보니,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따뜻한 대화를 나누기가 그 어느 곳보다 어렵고 벅차다는 점에서는 그야말로 외로운 공간이다. ...
  • 아기는 자고 있을 때가 제일 예쁘다고들 한다. 울고 떼쓰고 귀찮게 하지 않아서 그런가 했는데, 정말 자는 모습이 제일 예쁘다. 방글방글 웃거나 애교부릴 때도 예쁘긴 하지만 순전히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자고 있을 때가 더 예쁜 것 같다. 꼭 아기만 그런 건 아니다. 속눈썹을 드리우고 입술을 옴작거리며 평온히 자는 사람의 얼굴은 이상하게 아름다움의 감각중추를 자극한다. ...
  • 당신이랑 나랑 싸운다 치자. 열 받아서 서로 욕도 하고 발길질도 한다. 너 같은 놈하곤 다신 상종도 안할 거라고, ‘죽어버려라’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하고는 눈탱이밤탱이 된 눈 부여잡고 병원에 갔다. 근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치료 받다가 내가 죽어 버렸다. 당신이라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개 같은 놈, 잘도 뒈졌네!’ 하고 시원해 할까? 아마 아닐 거다.(아닐 거라고 믿는다;;) ...
  • '평화 인문학' 활동으로 안양교도소를 드나든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평화인문학 활동을 통해서 재소자들과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간식을 준비하며 강의를 들으며 함께 공부하고 있다. 처음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 낯선 곳도 낯선 곳 나름인지라 시작 전부터 약간 긴장했다. '어떤 분들이 함께 할지, 어떤 질문들이 던져질지, 또 나에겐 어떤 사건들이 들이닥칠지.' 기존의 내 머릿속에 있는 교도소의 이미지를 지우고 교도소 문 앞에 서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막상 교도소 문 안으로 들어갈 때는 그 이미지를 갖은 채 교도소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
  • 한 때 광고회사에 취직하고 싶은 적이 있었다. 종이, 활자, 색, 이미지를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감성을 흔들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 맘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광고회사는 기업의 상품을 팔기 위해, 눈을 홀리는 이미지와 현란한 수사로 사람들에게 뻥을 쳐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착한(?)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방법은 다른 데 있었다. ...
  • 라니! 아동 도서에서 이처럼 파격적인 제목을 찾기도 아마 쉽지 않을 게다. 이 책은 장애인과 안락사라는 첨예한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이 돋보이는 점은 섣부른 충고나 교훈을 주절주절 늘어놓기보다는, 그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하지만 아들의 최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아빠, 중증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끈을 놓을 수 없는 아들 ...
  • 근무하다보면 수용자 면회시 입회 하게 됩니다. 현재는 컴퓨터기술의 발전으로 이른바 무인접견이 실시되어 자동녹화기계가 대신하기도 하지만 예전에는 일일이 수용자와 가족이나 방문자의 접견 시 입회하여 대화내용을 수기로 기록하였습니다. 일상적인 안부 대화가 대부분이라서 별로 기억에 남지 않지만 아직도 어느 모자의 면회는 가끔 생각납니다. 아들은 무척 수척해 보였고 어머니는 초라한 옷을 입은 평범한 모자였기에 기계처럼 오가는 안부를 기록하려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
  • ‘법 앞에서’와 ‘밥 앞에서’

    카프카의 작품 중에 <법 앞에서>라는 아주 짧은 소설이 있습니다. 유명한 소설이기도 하고 워낙 짧은 분량이라 줄거리 요약이라는 게 이상합니다만 대강 이런 이야기입니다. 법 안에 들어가길 원하는 시골 사람이 있고, 그의 입장을 허가하지 않는 문지기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문지기는 자기 뒤에는 더 강한 문지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시골 사람은 어떻게 거기 들어갈 수 있을까를 골몰하며 긴 세월을 …

  •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 “아예 그럴 것, 차라리 법적 테두리 안에 들어와서 보호를 받으면서 하면 깨끗하고 또 안전하지 않을까요?” 현장에 있으면서 상당히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지난 2007년 (사)성매매근절을 위한 한소리회에서는 창립 20주년과 성매매방지법 시행 3주년을 맞아 ‘독일의 성노동 합법화, 그 이후 우리는 왜 반성매매인가?’라는 주제를 갖고 국제회의를 기획했다 ...
  • 지난 몇 개월 동안 내 활동의 주요 공간은 W-ing이었다. 재작년, 연구실 학술제 주요 행사였던 ‘현장인문학 워크샵’의 인연으로 그곳에서 강의도 하고 행사 때마다 얼굴도 비치곤 하다가 우연찮게 좀 더 가깝게 사귈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W-ing은 탈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쉼터와 자활훈련작업장, 그리고 그룹 홈과 임대주택을 포함한 주거공간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친구들’은 함께 생활하고 공부하고 일하면서 지낸다. ...
  • 서양의 건축가들은 건축의 본질적인 요소란 토대를 이루는 기단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인류의 기원적인 건축물이었을 게 틀림없을 집을 생각해보면,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래서 고전주의 건축논쟁에서 한 축을 담당했던 로지에가 그린 ‘원시적인 집’을 보면, 나뭇가지로 기둥을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허전하고 황당한 모습이다. ...
  • 예전 근무했던 학교에서 3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아이였다. 이 아이는 1학년 때 몸이 무척 아팠다. 아이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부모님과 의사 선생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자는 줄 알고 나누는 대화는 아이의 생존 가능성 여부에 관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다.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 된다면 삶이 끝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퇴원을 했다. ...
  • 는 로 1992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이탈리아의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의 최근 작이다. 이탈리아 최고 권위의 문학상을 받는 작가 니콜로 아망티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로, 2009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비평가상을 수상하였다. ...
  • ‘幸福’ 조그만 소리로 읊조려 본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거릴 수가 없다. 그럼 나는 지금 불행한가? 딱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불행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면, 그럼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그걸 때때로 잊고 산다. 시선은 늘 행복을 향하고 있지만, 발은 항상 더디 움직여 그런가? 이번에는 ‘行福’이라고 바꾸어 써 본다. 복을 향해 걸어가기. 복을 향한 적극적인 몸짓. ...
  • 처음 공방을 시작하며 이름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공방친구가 말했다 “달팽이 공방은 어때요?” “왜, 달팽이야?” 라는 나의 물음에 친구의 대답은 “작고 귀엽잖아요. 그리고 우리의 취지와도 딱 맞아 떨어지고. 세상의 흐름에 상관없이 천천히 가는......” 실제 대화가 이랬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그 후 특별히 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달팽이 공방으로 부르게 되었다. ...
  • 나뭇결이 벗겨지고 손때가 묻은 둥그런 밥상. 생선조림과 묵은지찌개, 호박전, 가지나물, 겉절이 등 9첩 반상이 올랐다. 푸짐하다. 게다가 3월 하순 다순 햇살이 비스듬히 밥상 위로 쏟아지니 잡지의 화보처럼 입맛을 돋운다. 첫술을 뜨며 두런두런 이야기 오가고 젓가락이 스친다. 반찬이 금세 동났다. 밥 한 그릇 뚝딱 비운 식구들은 가위바위보로 설거지 당번을 정하느라 왁자지껄 소동이다. ...
  • 아이는 놀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아이는 놀이 속에서 자신의 환상을 극화함으로써 무의식적 갈등을 상징화하고 극복한다. 가령 ‘피터’라는 아이가 장난감 마차와 자동차를 부딪치거나 쓰러뜨리며 놀 때 클라인은 그것이 사람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네 두 개를 마주보고 흔들리게 해 놓고는 사람이 앉는 부분을 가리키면서 “이게 어떻게 서로 부딪치는지 봐요” 라고 할 때 클라인은 그네가 성기를 부딪치는 아빠와 엄마라고 해석했다. ...
  • 노근리라고 쓰고 대추리라고 읽는다

     

    <작은연못> 시사회 날. 친구 따라 극장 갔다. 일전에 얼핏 들었다. 노근리 사건에 관한 영화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대추리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알고 갔다. 친구가 그랬을 리 없다. 내 머릿속 편집기 소행이다. ‘노근리’를 ‘대추리’로 접수한 것이다. 극장 안. 무대인사 차 올라온 제작자가 말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에 맞춰 영화를 개봉하게 됐습니다.” 그 순간 왜곡됐던 기억이 재빠르게 돌아왔다. “아! …

  • 2010년은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래서 쇼팽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쇼팽 컬렉션 CD가 발매되고 기념 음악회가 열린다. 그리고 KBS클래식FM(93.1㎒)에서는 탄생일인 2월 22일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기존 편성을 대신해 약 20시간 동안 쇼팽의 전곡을 방송하는 특집 '아이 러브 쇼팽(I love Chopin!)'을 마련했다. ...
  • 장찢고 하이킥을 연재하던 현민은 지난 3월 12일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아래 영상은 그날 아침 현민과 그의 친구들의 만남을 짧게 기록한 것입니다.
  • 매이 낳고 얼마 안 있어 아내가 해 준 얘기가 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내의 조카가 지금의 매이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일이란다. 만두를 먹다가 속이 너무 매워 뱉어 버렸는데, 옆에 있던 어른들이 “다음부터, 얘, 앙꼬는 빼고 줘라”고 했다. 그 이후 그 조카는 모든 음식의 ‘앙꼬’는 먹지 않겠다고 했다. 호빵의 앙꼬는 물론, 김밥의 앙꼬도, 호두과자의 앙꼬도 달걀의 앙꼬도, 참외의 앙꼬도 ...
  • 장사익의 노래 은 모성의 지극함을 보여준다. 꽃구경 가자는 말에 입이 헤벌어져서 아들 등에 업힌 노모는, 숲속 깊숙한 곳에 들어서자 꽃구경이 그냥 꽃구경이 아님을 직감한다. 노모는 순간 너무 놀라 말을 잃고 눈조차 감아버린다. 하지만 곧 정신을 추스르고 아들을 위해 솔잎을 따서 길에 뿌린다. 헨젤과 그레텔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빵조각을 뿌렸듯이, 노모는 아들의 귀환을 염려하며 솔잎을 뿌린다. ...
  • 얼마 전 세상을 놀라게 한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 사건이 있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소녀에게 일어난 끔직한 사건, 물론 김길태는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 사건 직후 성폭력과 관련한 수많은 논쟁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성폭력과 성매매의 연관성에 대한 기사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3월 11일자 중앙일보 사설에는 우리 사회는 남자들의 성욕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면서, ‘홍등가가 여염집 규수의 정조를 지킨다’ 는 엣 말을 떠올리며, 가난하고 소외된 젊고 늙은 남자들이 적당한 가격에 성욕을 해결할 곳이 없어졌다고 개탄했다. ...
  • 검찰청 호송버스 타러가던 날

    한국에서 병역거부 운동이 갓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당시 활동가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가이드북”이라는 것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병역거부에 대한 개념도 제대로 없던 시절, 병역거부를 고민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담하다보니 필요성이 제기되어서 만들게 된 소책자였습니다. 그 가이드북 안에는 입영영장이 나온 뒤 병역거부를 하고 나서의 일련의 사법절차들, 감옥에서의 생활에 관한 소개가 나와 있었습니다.

    이 가이드북이 쓰인 것도 벌써 …

  • (2005)는 으로 흥행배우 반열에 오른 강지환의 스크린 데뷰작이자, 같은 해 파키스탄 이주노동자와 촛불소녀의 사랑이라는 센세이셔널한 소재의 영화 로 이름을 알린 신동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신동일 감독은 에 이어 두번째 작품 (2006)로 평단의 주목을 받으며 ‘사회파 감독’이라는 칭호가 얻게 되었는데, ...
  • 며칠 전 버스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낯익은 가수의 노래 가사가 가슴 깊이 여운을 남긴다. 어린 시절에는 내 나이 서른 이후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서른도 까마득한, 마흔 줄에 들어선 나이라는 게 실감이 안 날 때가 많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멋있는 연예인을 보고 좋아하다가, 어느 순간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라는 걸 알았을 때 느끼는 소스라침도 요즘 자주 나타나는 증상 중의 하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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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하려거든 독사처럼

     

    지난 주 김예슬씨가 아주 상징적인(!) 대학인 고려대학교 경영대에서 ‘자발적 퇴교’를 선언했습니다. 그걸 본 순간, 스스로 ‘부스러기’를 자처하며 ‘덩어리’와의 싸움을 준비하던 70년대의 ‘전태일’이 떠올랐답니다. 물론 전태일은 조금 달랐죠. 분노와 슬픔, 어쩌면 희망까지를 끼얹어 그는 제 몸에 불을 놓았어요. 하지만 김예슬은 그런 것들을 발끝에 담아 적에게 거침없는 하이킥을 날렸다고나 할까요. 아무런 애원이나 호소, 청원이 담겨 있지 않은, 말 그대로 행동의 …

  • 아마도 요즘 독서계 최고의 화제는 단연 김용철 변호사의 는 책일 것이다. 이 책의 내용도 내용이겠지만, 이 책이 주요 언론에 전혀 광고되지 못하고 있는 저간의 사정으로도 는 충분한 화제꺼리가 되었다. 단지 조선, 중앙, 동아와 같은 보수적 매체뿐 만이 아니라 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와 같은 진보적 매체들도 이 책의 광고는 실지 않았다. ...
  • 몇 년 전 아주 좋은 동시 한 편을 만났다. 권영상 시인의라는 동시다.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고,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어눌한 강아지가 안쓰러워 눈을 조금 흘겼던 것 같다. 그러고도 몇 번을 더 읽었다. 눈으로 볼 때보다 입으로 종알종알 거릴 때 훨씬 더 감칠맛이 나서, 읽고 또 읽었다. ...
  • 화장품을 살 때에 제품에 ‘피부과 테스트 완료’라는 말이 붙으면 조금 비싸더라도 그것을 택한다. 왠지 부작용이 덜 할 것 같고 더 신경을 많이 쓴 듯해서 신뢰가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료’이전에 그 화장품의 개발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어떤 테스트를 어떻게, 누가, 누구에게 한 것일까? 화장품에는 독성 화학물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
  • 삶이나 혁명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혁명하면 대단히 장엄한 모습을 떠올린다. 지리멸렬한 현실과는 다른 고귀하고 위엄 있는 세계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인 혁명 세계는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균열을 일으킨다. 혁명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며, 숱한 실패와 좌절을 겪어야 하고, 또한 투쟁하는 동안에도 먹고사는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
  • 4년 전쯤, 과방에서 후배 한 명과 함께 밥을 먹고 있었는데 후배가 넌지시 나에게 물었다. '형, 심청이는 왜 인당수에 몸을 던졌을까요?' 그때 나는 '심청이? 왜 공양미 삼백 석 가지고 지아비 눈 뜨게 하려고 그런 거잖아.' 라고 답을 했다. 그러자 후배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아무래도 자기가 살기 싫으니까 뛰어 내렸던 거 같은데.' 라고 나의 대답에 대꾸했다. ...
  • 요즘에는 청년이 유행어다. 입을 열면 청년, 입을 닫아도 청년이다. 하지만 청년이라고 해도 일률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깨어 있는 자도 있고, 자고 있는 자도 있으며, 혼수상태에 있는 자, 엎드려 있는 자, 놀고 있는 자와 그 밖에 여러 가지가 있다. 물론 전진을 지향하는 자도 있다. 전진을 지향하는 청년들의 대부분은 지도자를 찾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절대로 찾지 못할 것이라고. ...
  • 풍상에 시달린 영혼은 사납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같은 영혼을 사랑한다. 형태도 색도 없이 생생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사나움에 나는 입을 맞추고 싶다. 가엾는 이름난 정원에 진귀한 꽃과 풀이 만발하고, 두 뺨이 발그레한 숙녀는 뜬 세상 아랑곳없이 이리 저리 거니는데, 외마디 학 울음소리에 흰구름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 “생각컨대, 나 자신은 아직까지도 간결함이 치밀어 저절로 말로 되어 나온다는 식의 인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 무렵 내 적막의 슬픔을 잊을 수 없는 탓이어서인지 때로는 뜻하지 않은 납함이 입에서 나올 때가 있는데, 그나마라도 적막 가운데를 돌진하는 용사로 하여금 그가 안심하고 앞장서 달릴 수 있도록 다소의 위안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
  •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은 이미 루쉰 연구자들에게 고전으로 읽히지만, 이 작품이 그저 연구서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루쉰>을 읽으면 여러 곳에서 비약이 눈에 띄는데, 짙은 정서가 그런 비약마저 머금고 하나의 전체상을 구현하고 있다. 그 속에서 루쉰의 다양한 면모는 ‘문학가 루쉰’으로 응결된다. ‘문학가 루쉰’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다케우치가 루쉰의 사상적 장소를 ‘문학’에서 찾을 때 ‘문학’은 이미 그 의미가 바뀌고 있다. ...
  •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팔리고 있는 중국현대문학 작품 가운데 90% 이상이 루쉰(魯迅)의 작품이다(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수치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말은 “루쉰”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면 웬만큼 팔린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럴까, 루쉰의 대표작인 을 타이틀로 달고 나온 책들을 서점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나 를 내걸고 ...
  • 1909년 일본에서 귀국한 루쉰은 항주와 절강에 있는 두 사범학교에서 생리학과 화학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이듬해 고향인 소흥부 중학교의 교사로 취임했다가 중화민국정부가 수립되던 해 산회초급사범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1912년부터 17년까지 잠시 공백이 있었지만 교육부 직원으로 일하다가 1920년부터 베이징대와 베이징여자고등학범학교에 출강했고 ...
  • 9천원. 누군가는 하루 술값도 되지 않는 돈이라 가볍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노동시장에서 원천적으로 배제 당하고 있는 중증장애인에게는 피 같은 돈이다. 그 돈이면 하루 1시간 이상 중증장애인이 활동보조를 받을 수 있는 비용이다. 그런데 MB는 중증장애인을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중증장애인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바로 앞에서 코를 베어가 버렸다. ...
  • 편집자의 말 – 아이가 되기 위한 인문학

    3년 전 즈음, 어느 어린이 독서캠프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철학 강연을 해달라는 거였는데요. 제목이 ‘철학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아마도 세상의 여러 물음 중에 제일 무서운 게 ‘…란 무엇인가’ 아닌가 싶어요. 요즘 제 딸이 글자, 특히 받침 없는 글자를 조금씩 읽는데요. 어제는 책상에 있던 플라톤의 <정치가>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보더니, 두 글자가 똑같다고 ‘정치’를 가리킵니다. 아직 …

  • 서현의 <눈물바다>는 표지부터 상큼하다. 앞표지에 있는,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는 아이 얼굴이 뒷면으로 가면 싹 바뀐다. 활짝 개어있다. 표지만으로도 눈물의 힘을 느끼게 한다.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다더니, 작가의 재치와 유머도 돋보인다. 상상력도 남달라, 첫 페이지부터 독자를 휘어잡는다. 시험 보는 교실 안. 아이들은 제각각이다. ...
  • 지난 겨울방학, 풍경 아이들과 서울여행을 떠나 ‘수유너머 남산’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날 고병권 선생님은 풍경 아이들에게 연구소 공간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선생님의 이야기 속에서 그곳은 더 이상 낡은 건물이 아니었다. 수유너머에 계신 분들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나에게도 이런 공간이 있다. 지금은 없어진 곳. 예전 근무했던 학교 건물이 몇 년 전에 사라졌다. ...
  • 달팽이 공방에서는 일 년에 네 번 워크샵을 엽니다. 우리밀로 빵과 과자를 만드는 제비꽃 빵집 워크샵과 천연 비누와 화장품, 그리고 대안 생리대를 만드는 작은 달팽이 공방(작달공)워크샵이 있습니다. 워크샵에서는 단지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된 책들을 함께 읽고 짧은 글을 쓰며 우리의 삶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눔으로써 ...
  • “처음 왔을 때 엄청났죠. 말이 공부방이지 골목을 막아서 천막 치고 주방으로 쓰고 있었어요. 애들은 시커멓고. 첫날에 5분 정도 앉아 있다가 급한 볼일 있다며 도망치듯 나왔어요.(웃음) 다음 날부터 근무했는데, 제가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한 말이 이랬대요. 너희들 정말 안 되겠구나!” 구로동 일대에 철거가 한참이었다. 어수선한 틈에 아이들은 방치됐다. 어느 날 집에 가보면 아이만 두고 가족이 다 이사를 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들은 자주 싸웠다. 거칠었다. ...
  • 배움이란 소박한 것이다. ‘학學’이라는 글자가 만들어진 배경만 봐도 알 수 있다. 학學은 원래 집을 짓는 일에서 유래했다. ‘짚이나 억새 등으로 덮은 초가지붕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새끼줄로 묶는’ 일을 상형한 게 학學이다. 지붕宀 위에서 새끼줄爻을 묶는 두 손의 모양을 보고 글자를 만든 것이다. ‘뚜껑 있는 집’에 살려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의미가 학學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래 까막눈도 할 수 있는 게 배움이어야 한다.
  • 도토리(道土里) 서당은 고전 속에서 우리의 삶의 길(道)을 찾는 친구들이 토(土)요일에 모여 공부하는 마을(里)이란 뜻이다. 서당은 초등학생, 중학생, 학부모들 할 것 없이 함께 모여 고전을 공부하는 만남의 場을 마련하였다. 기본적으로는 고전강독, 산책, 점심 먹기, 시 감상, 독서 토론 시간으로 나뉘지만 모두 고전을 입으로 암송하고 손으로 쓰면서 몸에 새겨 넣는 활동이다. 앎과 몸이 일치할 때 공부가 내 몸 안에서 울려 퍼지고 다른 이들과도 공명할 수 있다.
  • 보리학교는 청소년과 함께 인문학을 공부하는 ‘학교’입니다. 연구자가 즐겁게 공부한 것을 청소년과 나누는 소박한 장입니다. 웃고 떠들고 가끔(!) 진지해지고 글을 써보고. 그 와중에 인문학이 슬그머니 끼어듭니다. 인문학은 어렵고 힘든 ‘학문’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자는 고민에서 출발한 ‘공부’입니다. 많이 배워야 할 수 있는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공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공부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 ‘자기 …

  • “매이꺼야” “아냐, 엄마꺼야” “아냐, 젖꼭지 매이꺼야”, “이게 어째서 매이꺼야?” 오늘도 목욕 중인 매이와 아내 사이에 젖꼭지 분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음심 가득한 눈으로 엄마의 젖가슴을 찝쩍거리면서 시작됐다. 아내가 무시하자, 콧소리를 섞어서 “엄마 한 번만” 한다. 아내가 피곤한가 보다. “안 돼! 아까도 많이 먹었잖아” 호락호락 젖을 주지 않자 매이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
  •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암송하는 즐거움

    고전(古典)은 수 천 년 나이를 먹은 우리들의 친구이자 스승이다. 시(詩)는 풍부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된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스승의 지혜를 우리들의 목소리로 지금 여기로 불러 오는 것이 바로 ‘암송’이다. 소리로 그 의미를 되새김질 하는 것은 옆의 친구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수 천 겹의 지혜의 지층을 펼쳐 보여 …

  • 는 이러한 남녀의 정서적 차이가 담겨있는 로맨틱 실연극이다. 그 이름도 평범한 ‘톰’이라는 남자가 ‘썸머’라는 여자에게 반해 300일간의 행복한 연애를 즐기다가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고 200일 가량 폐인생활을 겪다가, 정신줄 챙기고나서 ‘오텀’이라는 여자와 새 연애에 돌입한다는, 흡사 ‘곤충의 한살이’ 같은 생태스토리를 식 시간뒤섞기 편집으로 ...
  • “그런데, 아이 키우기에는 위험하지 않을까?” 매이 낳고 얼마 안 돼 집에 놀러온 아내 친구의 말이었다. 동네 자랑을 한참 하던 아내의 말끝에 나온 대꾸에 “글쎄요”, 하고 넘어갔지만, 똑 부러지게 반박해 줄 걸 그랬다. 용산구 후암동 종점 옆의 지금 집으로 이사온 건 임신 7개월 무렵이었다. 출산 예정일이 다가오면서 아내 옆에 있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고 ...
  • 처음부터 끝까지 귀로만 듣게 되는 책이 있다. 신명조체의 활자가 한순간에 저자의 목소리로 변해 귀에 박히는 책. 저자와 약간의 일면식이라도 있거나, 그 자신의 문체만큼이나 독특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쓴 책이라면 더 그렇다. 윤구병의 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칼칼한 선생의 목소리가 쟁쟁 울리고, 그때마다 변산 공동체의 명랑, 왁짜, 싱싱한 풍경들이 활짝 피어난다. ...
  • 한 독자가 제보를 했다. 그린비 다섯 권 모두가 ‘다음’의 한 카페에 PDF파일로 통째로 올라와 있다고. 카페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기가 막혔다.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내려받기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이름하여 디지털 시대정신, 유비쿼터스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 30대 초반의 영어학원 강사였다. ...
  • 드디어, 결국, 마침내 금서령이 떨어졌다. 앞에 거창한 수식어를 사용한 까닭은 사실 머지않아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감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도 아닌데 웬 금서령이냐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금구매서령(禁購買書令)이라 해야겠다. 이런 상황이 닥친 것은,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아들 녀석의 책상 위에 얌전히 놓인 지난 달 카드 사용 내역서를 봐 버렸기 때문이다. ...
  • 두 영화의 공간은 낡은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공간을 구획하여 최대한 사생활이 보장되도록 격리된 수 십 개의 동일한 주거공간을 만들어낸다. 우리 집과 똑같이 생긴 거실에서 누워 똑같은 위치의 TV를 보겠지만,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지 않다’. 아파트는 ‘알고 싶지 않은’ 욕망이 축조된 공간으로, 그곳에서 타인과의 조우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다. ...
  • 학금 블랙리스트화를 멈춰라! 학비를 무료로! 학생생활비를 보장해라! 학생에게 임금을! 이런 요구를 하면서 <블랙리스트 회>는 활동해 왔다. 이 운동체가 생긴 것은 2009년 1월이었다. 그 전달(2008년12월)에 JASSO(일본학생지원기구)가 장학금 반납[상환] 체납자를 1400개 남짓한 금융기관에 보고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그 계기였다. 이는 곧 장학금 반납 체납자를 블랙 리스트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
  • 금강산(22)은 겨울방학 동안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있다. 10시부터 12시까지 한 타임 듣는다. 학원이 끝나면 12시부터 4시까지 카페에서 숙제를 한다. 세미나 관련 책 읽기나 글쓰기 등. 어떤 날은 아르바이트를 한다. 오후 다섯 시 반에 귀가해서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렸다가 같이 저녁밥 해먹고, 드라마 한 편 보고, 그리고 영어단어 좀 외우려고 책을 뒤적거리다가 잠이 든다. ...
  •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유시버클리(UC Berkeley), 유시엘에이(UCLA) 등 ‘유시(UC)’ 계열이 모두 여기 소속이다. 그런데 작년 11월 유시버클리와 유시산타크루즈에서 미국 대학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학생들의 건물 점거 투쟁이 일어났다. 등록금 인상이 그 발단이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대학지원 예산을 6억3천7백만 달러나 삭감했다. ...
  • <위클리 수유너머> 5호 특집 주제는 ‘대학 등록금’입니다. 비싼 등록금이 가난한 이들을 배움의 장에서 내쫓고 있습니다. 고등교육에 들어갈 학비를 내려줄 생각은 죽어도 하기 싫은 모양입니다. 등록금을 내리느니 싼 이자로 빌려주겠다는 건데요. 대학은 등록금 올려받고 정부는 이자받고 빌려주고. 무슨 짜고 치는 사기꾼들 같습니다. 서민들의 피를 빠는 사채업자들 광고 있지 않습니까. ‘싼 이자 묻지마 대출’, ‘나중에 돈 생길 때 갚으면 돼요’. …

  • 난 백수다. 가끔은 문필하청업자 노릇도 한다. 둘째 놈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해리포터를 찜쪄 먹을 수 있는 대작을 터뜨려서 인생이 한 방이라는 걸 보여주라고 성화지만, 그건 너무나 먼 세상의 이야기라……. 그냥 산다. 설렁설렁 건들건들. 마흔을 훌쩍 넘겨 깨달은 건, 살아 보니 내 욕심껏 세상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러니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게 제일이라는 거 ...
  • 세뱃돈을 꼬박꼬박 받던 시절, 명절 한 번 세고나면 큰댁에서 얻어온 부침개와 나물들, 선물로 들어온 과일들이 집안 가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명절 음식을 좋아하는 저는 흐뭇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지요. 하루 이틀정도 먹다가 실수로 냉장고에 넣지 않은 나물은 쉬어버리고, 부침개들은 맛있는 것만 다 빼먹고 맛없는 것들은 냉동실 한켠에서 빙하기를 맞이하고, ...
  • 대학 등록 시즌이 돌아왔다. 이 맘 때면 신00여사는 내가 내미는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들고, 이렇게 소리치곤 했다. “등록금 낸 만큼 뽕을 뽑아라! 아니 그 2배로 공부해라! 돈 아깝지 않게!” 대학원 진학 후 더 이상 신여사께 등록금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이제는 매 달 은행이 나에게 다음과 같은 문자를 보낸다. “0월 0일 학자금 대출 이자 출금일입니다. 통장 잔액을 확인해 주십시오.” ...
  • 인간 에일리언은 뱃속에서 나오고 나서도 오래 동안 엄마 몸에 달라붙어 있다. 젖을 빨고 정서적으로 교감하고, 때로는 바다 달팽이의 기생충처럼 숙주가 전에 없던 행동을 하게 만든다. 2008년 5월 이 에일리언들은 집에만 있던 어미를 광장과 가두로 뛰쳐나오게, 그래서 광우병 원인물질의 유입을 저지하는 싸움에 앞장서게 만들었다. 촛불시위의 배후에는 에일리언이 있었다. ...
  • 일본에서 첫 이사를 준비 중이다. 이것이 참 성가시다. 값싼 곳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도 부담이지만, 외국인 등록증, 소속기관 증명서, 일본인의 보증이 필요하다. 나는 명확하고 예의바른 일본어를 쓰려고 노력한다. 연수입을 적는 란 앞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자 옆에 있던 친구는 말했다. "그냥 많이 적어요!" 집에 돌아와 일본인 선생님에게 보증인을 부탁하는 정중한 편지를 썼다. ...
  • 만국의 가난한 이들에게

    “혼자 살 건지, 함께 살 건지의 문제입니다.” 이번 3호 <전선인터뷰>를 위해 ‘빈집’을 찾았을 때, 아규씨가 한 말입니다. 제가 물었거든요. 당신한테는 집이 무엇이냐고. 웬 동문서답인가 싶었는데, 어쩐지 그 말이 묘하게 저를 사로잡습니다. 집만이 아니겠지요. 세탁기도 그렇고, 냉장고도 그렇고, 책상도 그렇고. 혼자 쓸 건지, 함께 쓸 건지 생각해보라는 건데요.

    혼자서 오래 넓게 누리는 게 불가능한 빈자들은 결국 함께 …

  • 2호에서는 만두를 만들었습니다. 오늘은 커피를 볶아볼까 합니다. 키보드 자판으로 ‘커피’라는 단어만 적었는데도 코 끝에서 커피 향이 나는 듯합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의 알갱이는 원래 푸른색입니다. 로스팅 작업을 거쳐서 갈색으로 된 것을 갈아서 마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커피가 원래 푸른색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마시는 커피를 ...
  • 수업시간이다. 아이들의 표정에 지루함이 담긴다. 자신도 모르게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아이도 눈에 띈다. 뭔가가 필요하다. 오늘은 어떤 책으로 아이들을 깨어나게 할까? 그래, 차윤정 선생의 을 소개하자. “얘들아, 내가 퀴즈를 낼 테니 맞춰봐!” 아이들의 눈이 열린다. 귀를 쫑긋 세운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는 하지만 덩치만 컸지 역시 아이들이다. ...
  • 1월 1일 모 일간지 일면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2000원에 주인 되는 집! 주거난에 허덕이는 이들을 단박에 유혹하는 이 제목은 서울 용산2가 해방촌에 있는 대안적 주거공동체 ‘빈집’을 소개한 기사였다. 빈집은 하루 2,000원 이상의 분담금만 내면 누구나 머물 수 있는 일종의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다. 하루를 묵는 것도 몇 달을 머무는 것도 자유다. ...
  • 1월 22일 ‘글리벡’의 약값 인하를 취소하라는 서울 행정 법원 행정3부의 판결이 나왔다. 글리벡은 1일 1회 복용함으로써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백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희소 의약품으로, 스위스 노바티스사에서 개발하여 2001년 미국 식품 의약국 안정청의 승인을 받으며 국제 시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백혈병 치료를 위한 만족할 만한 대체 의약품이 아직 개발되지 않은 ...
  • 김기덕의 영화가 종교적이라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혹자는 때 ‘폭력에서 종교’로 변절한 것 아니냐며 휘둥그레했지만, 이나 도 이미 충분히 종교적이었다. 단,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단어는 ‘현실 종교적’이라는 협의가 아니라, ‘종교의 원형질’에 가까운 광의로 이해해야 한다. ‘종교의 원형질’이란 이를테면 ...
  • <불신지옥>에서 짧지만 강렬한 공포를 안겨주는 인물로 경비원을 꼽을 수 있다. “월남전...베트콩...빨갱이 새끼...재수 없고 요망한 년...십창을 내어...삼청교육대...서울대 나온 놈이 내 앞에서 벌벌벌....” 등의 섬뜩한 언사를 자기도취 상태로 내뱉는가 하면,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태도를 보인다. 또 희진의 환상 속에서 누워있는 희진에 올라타 다리를 긁어대는 ...
  •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에서, 2차선 도로로 40분을 달리면, 지르매재 넘어 내촌면이다.” 영화는 강원도 산골 마을의 한적한 모습과 그 위로 들려오는 감독의 푸근한 ‘이야기’로 이루어진, 짧은 프롤로그로 시작된다. 그곳엔 지어진지 50년이 넘었고, 언젠가부터(정확히 말하자면, 날아온 씨앗이 싹을 틔워 작은 나무가 되는 세월 동안) 마을의 비료창고로 쓰이고 있었으나, ...
  • 는 너무 다른 두 ‘날 것’의 이야기다. 크나큰 배고픔 하나밖에 없는 여우 씨는 숲속 호숫가에 홀로 앉아 있는 엄마 오리를 보자,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그럴듯한 허울을 붙이기는 하지만, 속이야 뻔하지 않은가! 대책 없는 엄마 오리는 자기만 살겠다고 제 새끼(알)를 남겨둔 채 줄행랑을 치고, 여우 씨는 알과 친구가 된다. ...
  •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누대로 이어진 이 상투적인 질문 따위는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하고 말았다. 아무리 지적인 사람도 연애를 하면 상투적이 된다. 애기 목소리를 흉내 내게 되고, 온갖 유치한 감정놀이와 판타지에 몰입하게 된다. 자식과의 초기 관계는 확실히 연애 관계이다. 판타지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강렬한 연애관계다. ...